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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미국 뒤샹 vs 한국 뒤샹,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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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국내 최대 회고전

지난달까지 관객 10만명 들며 ‘대박’

미술관 쪽 “관객들 몰입 감상에 놀랐다”

미국에선 시장을 놀이터 삼은 거장

한국에선 저항·전복성 ‘도전자’ 주목

87년 6월 항쟁 뒤 최초 회고전 열려

국립현대미술관 ‘여행’가방’ 논란

조영남 ‘고스톱 대작 사건’ 등

뒤샹, 한국미술판에 또다른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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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하는건가?”

그림을 본 일반 관객들은 혀를 찼다. 배경이 시커먼 계단 위에 노랑 인간들이 죽 늘어서서 차례차례 오줌을 싸는 몰골이 펼쳐졌으니 말이다. 도상은 요상했다. 윗 사람이 눈 오줌발이 아랫사람 머리를 맞으면 그가 눈 오줌발과 합쳐져 더욱 커지는 패턴이 반복됐다. 그러다 맨 아랫사람은 이렇게 점점 커진 오줌발에 가려 통째로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작가의 속내를 아는 미술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두환 정부가 살기등등하게 출범한 직후였던 1980년 10월17일, 서울 대학로 미술회관(현 아르코 미술관)에서 개막한 리얼리즘 작가 동인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란 희대의 문제작이 등장했다. 작가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않고 출판 일을 주로 하면서 잡동사니들을 얽어 작업해온 주재환씨. <계단…>은 현대미술의 대부, 개념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프랑스 거장 마르셀 뒤샹(1887~1968)의 명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패러디한 것. 구체적인 인물 형상은 사라지고 계단을 종종거리며 내려오는 움직임만 담은 뒤샹의 코믹한 원작을, 주 작가는 권력의 숨은 질서를 보여주는 풍자화로 익살스럽게 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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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불온하게 본 당국이 전시회장의 전기를 끊으면서 전시는 하룻만에 중단되었고, 그해 11월 서울 인사동 동산방화랑으로 옮겨져 다시 치러지는 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출품작 <…봄비>는 한국 현대미술판에 뒤샹의 작품이 미친 그늘을 처음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원작은 그뒤 작가가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렸고, 지금은 그가 2000년대 새로 만든 판화와 유화가 전해질 뿐이다. 이제 78세의 원로작가가 된 주씨는 그때를 회고했다.

“서구 미술이 우월하다는 미술판의 맹목적 추종을 비꼰 거지. 우상파괴였어요. 미술사책에서 읽었던 뒤샹의 작품 이미지들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막연한 생각으로 한 건데, 기존 미술판의 도식적인 어법을 깨뜨렸지.”

작가의 패러디 그림이 나온 지 39년 지나 지금 한국 미술판은 뒤샹의 원작들을 둘러싼 열기로 후끈거린다. 지난해 12월22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 회고전(4월7일까지)에 관객들이 몰려들면서 신드롬에 가까운 열기를 낳고 있다. 뒤샹에 관한 한 세계 최대 규모의 컬렉션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레디메이드(기성품), 회화, 사진, 드로잉, 영상, 아카이브 자료 등 150여점이 나온 전시장은 평일에도 관객들로 북적거린다. 지난 1월말 이미 관객 10만을 넘어섰고, 지금도 평일엔 3000~4000명, 주말엔 5000~6000명의 관객들이 쇄도해 2년 전 이중섭전이 세운 관객 20만 동원 기록을 넘어 국립현대미술관 역대 최고 관객 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전시를 기획한 임대근 학예관은 “블록버스터 전시처럼 대작을 선보이는 얼개가 아니라 사진과 문서, 소품 중심의 아카이브 성격이 더 강한데도, 관객들이 오랜 시간 몰입감상을 하는 게 특징이다. 그동안 거장 전시에 보인 반응과는 크게 달라 놀랍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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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다. 저 유명한 1917년 미국 에모리쇼의 출품작 ‘샘’(변기)에서 보이듯, “예술품이란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며 작가의 고된 수공이 아니라 직관적 판단만으로 작품을 설정할 수 있다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던 혁명아다. 그림을 그렸던 1900~1910년대 청년기에 입체파, 야수파, 미래파, 세잔 같은 당대 주요 사조들을 모두 흡수했다. 전시장 초반부 <의사 뒤무셀의 초상> <아버지의 초상> <카드놀이> 같은 주변 인물과 풍경 등을 그린 회화 작품들을 보면 이를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다. 그뒤 그는 시장을 의식하고 화상의 주문에 따라 고통스럽게 붓질을 반복해야 하는 화가의 삶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1913년부터 자전거 바퀴, 변기, 병걸이, 빗 따위의 ‘레디메이드’로 이름붙여진 기성품으로 작업의 자장을 확 바꿔버린다. 가스, 공기, 유리창, 잡동사니, 체스, 계산서, 출판한 책, 서류 등 기존 미술의 영역에서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의 영역들로 예술적 상상력을 확대하는 작업을 펼쳤다. 말년기 50~60년대의 에로틱한 누드 설치작업 <에탕도네>까지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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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한국 관객들은 얼핏 보면 난해하고 기괴한 뒤샹의 원작 전시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2000년대 이후 각종 문화센터 등의 강좌나 대중 교양서 출간 덕분에 현대미술의 비조인 뒤샹에 대한 관심이 넓어졌다는 상식적 진단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과는 별개로 1980~90년대 이후 서구나 일본보다 다소 뒤늦게 뒤샹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벌어진 독특한 맥락의 사건과 현상을 배경으로 짚는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미국에서 뒤샹은 말년기 딜러이자 작가로서 시장과 미술판을 줄타기하면서 입지를 넓히고, 거장으로 부각되기 위한 처세의 면모가 도드라졌다. 반면, 한국에서 뒤샹은 기존 제도와 전통에 도전하고 경계를 깨뜨리는 도전자로서의 저항성과 전복성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전시장에서 보이는 것은 ‘미국의 뒤샹’이며, 한국의 뒤샹은 분명히 다르다는 이야기다.

뒤샹의 작품을 가지고 국내 회고전을 하는 것은 두번째다. 뒤샹은 1960~70년대 전위 오브제 작업, 해프닝 등을 벌인 국내 실험작가들에게 중요한 거장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변기 등의 레디메이드 외에 구체적인 작품론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윤진섭 평론가는 “70년대 초반 아방가르드 협회의 기관지 등에서 단편적으로 행적을 싣긴 했지만, 80년대까지 미술계 작가들도 깊은 이해가 없었던 상태였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1980년 홍익대 미대 대학원생으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관한 연구>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낸 원로작가 김용익씨도 비슷한 기억을 이야기했다.

“80년대초까지 뒤샹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이해도는 매우 낮았습니다. 다다이스트였고, 레디메이드 변기를 만들었다 정도로 알았고 그 외의 활동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요. 뒤샹의 변기조차 수업시간에 이일 선생이 다다이즘을 얘기하시면서 거론해 알게됐어요. 제 지도교수였던 이 선생은 뒤샹은 너무나 중요한 작가인데 한국에서는 여지껏 알려지지도 않고 연구하는 이들도 없는 불모의 영역이니 본격적인 연구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논문을 쓴건데, 그때까지 국내 대학의 뒤샹 관련 논문이 두건밖에 안됐고, 국문참고 문헌도 별로 없어 애를 많이 먹었어요. 70년대말 제 작품들의 일본 전시를 주선해주셨던 서구 평론가 조셉 러브가 이런 고민을 알고 뒤샹에 대한 원서들을 여러권 빌려줘서 요긴하게 참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논문은 당시로선 국내에서 나온 뒤샹 관련 논고들 가운데 국외 자료를 가장 폭넓게 섭렵한 성과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전에서 등장한 주 작가의 뒤샹 패러디 그림은 강렬한 비판적 형식으로 미술판에 충격을 주었다. 그뒤 신학철, 박불똥, 김정헌 등 리얼리즘 작가들 사이에서 뒤샹의 계보를 이은 팝아트, 콜라주 스타일의 패러디, 키치 스타일의 작품이 줄을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뒤샹의 혁명성을 미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힘으로 전화를 시도한 것은, 민중미술이라고 부르는 80년대 리얼리즘 진영의 작가들이었던 셈이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진보 리얼리즘 미술진영의 보루 구실을 했던 서울미술관에서 그해 9월 국내 처음 마련한 회고전도 그런 맥락이었다. 올림픽을 맞아 흥청거리는 미술계에 비판적 시선을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초대관장 퐁투스 홀텐의 소장품인 여행가방 컬렉션에 들어있는 28점의 미니어처 작품을 주로 선보였던 이 전시는 연속강연까지 마련하며 미술학도들의 관심을 모았다. ‘장영혜 중공업’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장영혜 작가는 당시 파리에서 유학하며 뒤샹을 전공했는데, 전시에 뒤샹 작품에 대한 설명을 쓰면서 “뒤샹 예술작품의 가장 큰 원동력은 작품의 개념화를 도발하면서, 나아갈수록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다”고 썼다. 하지만, 대중에겐 90년대까지도 거장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뒤샹은 2000년대 들어 두가지 사건으로 한국사회에 강렬하게 각인된다.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명품 <여행가방>을 6억원 최고가에 구입했다가 규정 위반 시비를 불러 김윤수 당시 관장이 엠비 정권에 의해 해임되는 빌미가 됐다. 뒤샹의 역마살, 현대미술의 유동성을 상징하는 여행가방은 정치적 스캔들의 소재로 전락했다. 2년 전부터는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조영남 고스톱 그림 대작 사건에 소환됐다. 조씨가 뒤샹의 팬이라면서 그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다른 작가에게 대신 그리게 했을 뿐이라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사기성을 가리는 법리공방 근거로 부각했고, 뒤샹은 조영남의 ‘주변 인물’처럼 대중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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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는 한국사회에 파장을 미친 뒤샹의 문제작들도 적지 않다. 탈 많았던 국립현대미술관 구입품인 1941년판 <여행가방>의 내용물들이 2008년 전시 무산의 기억을 뒤로 하고 지하 전시장에 나왔다. 주재환 작가의 그림 배경이 된 저 유명한 1912년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조영남 대작 사건의 배경이 된 레디메이드 <변기> <자전거 바퀴> 등을 구경할 수 있다. 다만, 뒤샹이 한국미술과 어떻게 인연을 맺어왔고, 미술판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춘 공간이 보이지 않는 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동광 평론가는 “한국 미술인들이 지금까지 뒤샹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했는지 내력을 정리하는 식으로, 색다른 관람 정보를 덧붙인 딸림 공간을 두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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