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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세상 읽기] 당신의 고향은 ‘언제’입니까 / 전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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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나는 1962년 서울 삼각지에서 태어났다. 삼각지는 분명 내 고향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지명만 남아 있을 뿐 내가 태어난 집도, 학교도, 동네도, 그리고 압도적인 이정표인 삼각지 입체교차로도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향민이지만 실향민이 아니다. 공간적 고향을 잃었지만, 시간의 고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롯하고 속해 있는 시간의 장소가 시간 고향이다. 공간이 변하거나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대체 누가 아찔한 입체교차로를 부쉈는가! 세상이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내 맘과 달리 변한다면 그것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간은 변하거나 빼앗기기 힘든 ‘장소’다. 모든 것이 변해도 시간 고향은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곳은 영원하다. 옛 모습 그대로 기억 속에 남아 언제든지 퇴각하여 나와 남들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처소, 그러한 동경으로 가득한 장소가 바로 시간 고향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우리는 시간의 장소를 자주 응시한다. 목표가 뚜렷했던 그때를 추억하며 고장 난 방향감각을 수리한다. 삶이 고단할수록 시간 고향을 자주 응시한다. 그곳에서 ‘잘나가던 그때’(사실 여부는 전혀 중요치 않다)를 추억하며 현재의 고단한 삶을 위로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할수록 시간 고향을 더 자주 응시한다. ‘우리가 이룩한 것’을 추억하며 짓밟힌 자부심을 다시 세운다. 그리고 시간 고향에서 위세를 떨치던 ‘적’을 되찾기 위해 시간 고향을 응시한다. 맞다. 시간 고향을 응시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찬란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함이 아니라, 그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사악하고 전능하며 명확한 적을 되찾기 위함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바처럼,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가치 체계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 불명확할 때 적을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우리가 추종했던 가치가 조롱받을 때 적의 존재를 통해 그것의 참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적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벗이다.

북과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구체화되면서 당황하고 허탈하며 불행해진 사람들이 있다. 자칫 불구대천의 적이 사라지면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정체성도 흐릿해지고, 자신의 자부심과 가치 체계도 짓밟히며, 정치적 권력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에코의 고약한 충고를 따르는 듯하다. ‘적이 없다면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적을 만들어 정체성을 회복하고, 가치 체계를 재생하며, 잃어버린 권력을 탈환하자.

지난 8일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 공청회’가 열렸다. 자유한국당의 국회의원들과 소위 5·18 전문가가 참석했다. 그들이 고함치며 규명한 진상은 이랬다. ‘북한군이 개입해 일어난 폭동이 종북 세력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했고, 폭동과 연루된 괴물들이 5·18 유공자가 되어 세금을 축내고 있으니, 애국 보수가 다시 정권을 잡아 괴물과 종북 세력과 북을 몰아내자!’

그들에게 지금은 적이 소멸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그들이 추종했던 전 대통령이 그리도 강조했던 ‘창조성’이 발휘되지 못한 탓인지, 새로운 적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새로운 적을 만들 수 없다면 과거의 적을 되살리면 된다. 그렇다면 역시 북한과 종북 세력이다. 시간의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던 적들은 그렇게 다시 현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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