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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3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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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의 진실과 아름다움

세계일보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우리 문화유산을 새롭게 보게 한 책이다. 예전에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지나쳤을 등산로 옆 후미진 곳의 사찰에 들러 건축물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오래된 건물을 보면 주변 환경을 둘러보고 기둥이라도 쓰다듬게 된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은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유홍준은 서문에서 책을 쓴 이유를 감명 깊게 적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좁은 땅에서 같은 운명공동체로 오랜 역사를 엮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역사의 연륜이 좁은 땅덩이에 쌓이고 보니 우리는 국토의 어디를 가더라도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영광의 왕도에서 심심산골 하늘 아래 끝동네까지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고 거기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국토박물관의 유물이 말해주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흔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식의 화려함에는 곧잘 현혹되면서도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음은 쉽게 놓쳐버린다.” 그래서 그는 가르치던 학생들이나 학자·문인·화가 등과 함께 열심히 답사를 다녔다.

“답사를 다니는 일은 길을 떠나 내력있는 곳을 찾아가는 일이다. 찾아가서 인간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기고 나아가서 오늘의 나를 되물으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그 땅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 답사를 올바로 가치있게 하자면 그 땅의 성격, 즉 자연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의 역사, 즉 역사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 즉 인문지리를 알아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답사는 곧 ‘문화지리’라는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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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다. 그 경험의 폭은 반드시 지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 삶의 체험 모두를 말한다.” 학생들이 문화유산을 새롭게 보게 하려면 답사만한 것이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남도답사에서 시작한다. 남도의 색을 강조한다. 먼저 남도의 흙이다. “누런 황토가 아닌 시뻘건 남도의 황토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시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어 하늘, 솔밭, 유채꽃, 동백꽃잎을 가리키면서 “그 파랑, 그 초록, 그 노랑, 그 빨강의 원색을 구사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남도의 봄 이외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한다. “남도의 봄빛을 보지 못한 자는 감히 색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면서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 원색”이라고 한다.

그는 남도답사의 첫 기착지로 전남 강진 월출산의 고찰 무위사를 택한다. “바삐 움직이는 도회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무위사에 당도하는 순간 세상에는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더욱이 그 소박함은 가난의 미가 아니라 단아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가 답사를 권하는 문화유산 곳곳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그는 사찰을 찾는 일이 잦다.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데다 하나같이 기막히게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트이면 시원스런 눈맛이 좋고 막히면 아늑한 운치가 좋다. 절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은 부처님이 앉아서 내다보는 경관이다. 어느 절을 가든 대웅전 기둥을 등에 대고, 또는 댓돌에 앉아서 앞에 있는 탑과 함께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황당한 찬사로 씌어진 문화재 안내문을 따라 보는 것보다 몇천 곱 가치 있다.”

경주 답사에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 몸체에 새겨진 명문을 소개한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진리의 둥근소리(圓音)를 듣게 하셨다.”

종소리는 진리의 원음인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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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은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고 한다. 이어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유한준이 석농(石農) 김광국의 수장품에 부친 글에서 찾아낸 말을 인용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소설가 김연수는 여행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서 이 말을 언급했다. “보이는 게 예전과 같이 않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보이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세상은 모르겠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알면 달리 보인다. 즉 생각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결국에는 세상을 바꾼다.” 여기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은 모르면 늘 똑같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날마다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결같은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다.” 유홍준이 공감할 만한 말이다. 절로 새겨듣게 된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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