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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꽃보다 잡초' 염정아, 그 놀라운 생존의 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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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와인 마실 때 가장 행복, 자는 아이들 키 만져보면 벅차올라"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지금, ‘생존형 인물' 연기할 때 일체감"
"승부근성있지만 안되는 일은 포기도 빨라"
"‘스카이캐슬' 엔딩… 한서진 자살로 죗값 치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조선일보

JTBC 드라마 ‘SKY캐슬'에서 상위 1%의 극성 엄마 한서진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염정아(48세). 드라마를 연출한 조현탁 PD는 그녀를 ‘예술적 동지’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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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서울의대에 보낼 수 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무릎 꿇고 돌을 맞아도 좋다'며 읍소하던 ‘SKY캐슬'의 염정아에게 사람들은 돌멩이대신 꽃을 던졌다. 욕망과 헌신을 장착한 현실의 엄마, 무늬만 ‘럭셔리한’ 잡초인 채로, 지치지도 않고 번식하는 그녀의 ‘노오력’에 감탄해서다.

과외 선생을 구하러 대치동 학원가를 종종거리고, 힘센 시어머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입시 코디네이터에게 무릎을 꿇고, 고교 동창생에게 눈알을 부라리고, 이웃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불안으로 으르렁대는 딸들을 어르고, 의붓딸을 협박하고… 브라운관에서 사방팔방 안쓰러울 정도로 뛰어다니는 염정아를 보며 생각했다.

현실에 저런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마냥 미워할 수는 없겠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하이힐을 신고 서 있어도 저 발바닥은 온통 불덩이겠구나.

‘염드리 헵번’이라는 별명처럼 진주목걸이에 명품 원피스를 입고 다녀도, 정작 한 집안의 욕망을 집행하는 말단의 집사로. 남편에게, 시어머니에게, 자식에게 쓸모를 인정받으려는 그녀의 헌신적인 몸부림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며 비지상파 역대 최고인 23.8%라는 신화적인 시청률을 이뤄냈다.

언젠가부터 염정아는 우리에게 윤리나 교양 너머 현실의 생기를 깨닫게 하는 배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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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는 꽃이라는 환상을 깨고 잡초와 잡초 아닌 것의 구분 없이 오직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을 꽃피운 여자. 그녀는 2006년 정형외과 의사 허일 씨와 결혼해 슬하 1남1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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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서 염정아에게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무기는 없어 보였다. 모호한 여백 없이, 그날의 가계부 쓰듯 또렷하고 현실적인 생활의 언어로 커리어의 빈칸을 메워온 염정아.

혼자 있을 때 더 도드라지는 김혜수의 관능이나 둘이 있을 때 절박해지는 전도연의 애교와는 다른 염정아만의 무엇. 그것을 ‘생존의 기품’이라고 부르고 싶다.

삶에서 극적인 퇴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통 여자로서 누리고 지켜야 할 중산층의 행복에도 즐겁게 집착하는 염정아를 만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교육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던,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는 마흔여덟의 귀여운 ‘억척 어멈’을.

한서진이 아닌 염정아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새끼를 둔 어미'의 자긍심으로 더욱 충만했다.

-사랑받는 기분이 어떤가요?

"(화사한 표정으로)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 꿈같아. 그래서 그냥 염정아로는 아직 못살고 있잖아요(웃음)."

-그냥 염정아로 사는 건 뭐죠?

"보통 엄마들하고 똑같아요. 한때는 저도 좀 애들 옆에서 달렸는데, 지금은 다 내려놨어요. 극성부릴 일이 아니더라고요(웃음). 안달복달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게 애들이 초등학교 5학년, 4학년이에요. 애들 믿어주려고요. 남편하고도 그래요. 함께 의논하면서 천천히 가자고."

-아이들에게 구체적으로 뭘 해주고 있지요?

"(잠깐 생각하더니)사랑? 하하하."

-사랑을 담은 간식이 아니고요?

"요리를 잘 못 해요. 대신 애들 예뻐 죽겠다는 액션은 내가 잘해(웃음). 애들이 그걸 너무 잘 알아요. 엄마가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거요."

-연기가 생활감으로 더 좋아졌더군요. 가정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연기도 좋아진다는 걸, 당신을 보고 느껴요. 겉절이는 겉절이대로 묵은지는 묵은지대로, 공장 김치와는 다른 깊은 맛이 있듯, 당신 연기가 그래요. 화면에서 겉돌지 않고 싱싱하면서도 깊어요.

"(미소지으며)조금씩 조금씩 나아졌어요. 생활도 연기도 할수록 어렵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제가 그만큼 편하다는 거잖아요. 사실 매 순간 헤쳐나가는 게 두렵지만, 늘 그럭저럭 헤쳐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잘 넘어가도 또 겁나는 순간이 닥쳐요(웃음). 그래서 저는 저한테 칭찬을 듬뿍 해줘요. "잘했네!" 하면서.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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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완벽한 타인(2018년)'에서 남편에게 구박받는 주부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한 염정아. 세밀한 드라마 연기와 극적인 영화 연기가 뒤섞인 최상의 밸런스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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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완벽한 타인'의 수현과 드라마 ‘SKY캐슬'의 한서진은 염정아의 DNA를 반반씩 나누어 가진 이란성 쌍둥이 같았습니다.

"그렇죠? (활짝 웃으며) 저는 ‘완벽한 타인'이 정말 좋아요. 원작에서와는 다른 한국식 캐릭터가 나왔잖아요.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억눌리고, 시부모와의 관계에서 속끓이는 감정의 결이 풍성하게 드러나서 정말 좋았어요."

-‘스카이캐슬’에서도 당신은 전투력이 탁월한데, 오직 시어머니와 남편에게서만큼은 굉장히 순종적이더군요. 기존 질서에 순응하려는 기질과 인정 욕구가 스파크를 일으킨다고 느꼈어요.

"그런 면이 있죠. 한서진도 모든 인물과 물어뜯어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는 그러지 않거든요. 한국의 주부들이 많이 그러실 거예요. ‘완벽한 타인'을 보고도 많은 분이 "우리 엄마 생각나서 속상했다" 그러세요. 영화에서 유해진 씨가 어머니 헤어 스타일 바뀐 것만 이야기하자 나중에 제가 그러잖아요. "나 머리했다, 어머니만 한 거 아니야." 사람들 앞에서 내가 치마를 확 뒤집어야, 그 정도 세게 나가야 ‘남편이 봐주는 거야?’ 싶은 거죠. ‘스카이캐슬'에서도 "어머니, 보세요! 내가 우리 애 서울 의대 보내서 당신 아들보다 더 잘 되게 하겠다." 그런 식의 도발이 저한테 있는 거죠."

-순종과 도발이 뒤섞여서 기이하게 설득되는 지점이, 염정아의 연기에 늘 있었어요. 밀린다 싶을 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서 확 지르기도 하면서.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후련한' 거죠.

"그런 상황이 현실에서 원래 많잖아요. 제가 중간 세대라서 그런 감정을 잘 이해하나 봐요(웃음)."

내 기억 속에 염정아는 남자의 보호를 받다 눈물을 쏟는 멜로드라마의 ‘민폐 여주인공'을 연기한 기억이 없다. 어설프게 웅변하는 듯한 말투를 쓴 적도 연극 배우 같은 도취적 독백을 한 적도.

-"아갈머리 확 찢어버릴라"라는 대사를 내뱉을 땐 기분이 어땠나요?

"재밌었어요. 사실 입에 담지도 못할 무서운 말이잖아요. 평소엔 교양을 온몸으로 휘감고 다니다가 ‘나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 말문을 막아버리니까. 이렇게 대놓고 상스러울 수가!"

-어떤 상황에서나 자기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 집착형 인물'에 매료되는 건 본인의 취향이겠지요?

"전 그런 인물이 끌리더라고요. 물론 한서진은 좀 심했죠.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 말고는 관심이 없으니까.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적 인물이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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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말고 다른 결말을 상상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비장하게 답했다. “한서진이 죗값을 치르려면 명주 언니(김정란 분)처럼 자살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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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했던 대사는 "예서야, 사랑해"였다고 했다. 세상 전체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나와바리’에서만큼은 내 새끼를 지키겠다는 어미의 욕구는 얼마나 절실한가. 다양한 등장인물과 전투 모드를 유지해야 했기에 계산 없이 만나는 ‘조선생'이나 ‘차민혁'이 가장 편한 상대였다.

-의붓딸이었던 ‘혜나’는 어떤가요? 열병에 정신 나간 혜나가 "엄마!"하고 파고들 때, "얘가, 왜 이래?" 물리치는 데 온몸에 찬 바람이 불더군요.

"(뾰로통한 표정으로)혜나도 어른한테 하는 행동이 너무 과했잖아요. 전, 그 아이가 미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아직 애니까, 어른이 혜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됐겠지만."

-문득 ‘장화 홍련'에서 두 자매(임수정, 문근영)의 히스테릭한 새엄마로 등장할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간 영화계에 없었던 하이톤의 주파수를 귓전에 울려대며.

"어머 기억나세요? 전 그때가 전 아주 먼 옛날 같아요(웃음)."

그녀를 처음 만난 건 17년 전 영화 ‘H’ 촬영이 끝나고서였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잘하는 여배우가 TV 사극에서 왕건의 둘째 부인 같은 전형적인 조연만 한다고 안타까워하던 봄 영화사 오정완 대표가 그녀를 영화계로 불러들인 직후였다. 가죽 코트를 입고 석양을 등지고 섰던 그 날의 염정아는 명랑하고 재능 있고 예뻤지만, 뭔가 운이 풀리길 기다리는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였다.

이후 김지운 감독이 ‘장화 홍련’에서 염정아의 히스테리를 추출한 건 한국 영화사의 ‘화학적’ 쾌거였다. 아직도 꽃무늬 벽지를 뒤로한 채 임수정과 문근영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성난 고양이 같은 얼굴과 감전될 듯한 고음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2004년 최동훈 감독이 그녀를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으로 호출하면서 염정아의 색깔은 더욱 분명해졌다. 복잡한 배후도, 사치스러운 죄의식 없이도 고압 전류가 흐르는 팜므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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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화 홍련(2003년)'에서 새엄마 역할을 맡은 염정아. 김지운 감독이 ‘장화 홍련’에서 염정아의 히스테리를 추출한 건 한국 영화사의 ‘화학적’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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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정아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을 가정법이지만, 만약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자기 검증의 불안감이 1%도 없는 그를 만날 때면, 괜스레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질투와 교만을 깔지 않고도 순식간에 에스트로겐 수치를 극한으로 높일 수 있는 염정아만의 나이스한 승부 근성, 큰언니 같은 생활력에 손뼉을 치며.

-쌈닭 기질이 있습니까?

"꼭 그렇진 않아도 제가 맏이라서 동생들을 보호해야 했으니까, 자랄 때 대장 노릇을 좀 했죠(웃음)."

-희생적인 어머니 밑에 자랐다는 게 당신 연기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나요?

"(골똘히 생각하다)엄마의 영향보다는, 사실은 제 기질이 좀 희생하는 걸 좋아해요. 남들이 좋아하면 제가 좀 불편한 건 기분 좋게 감수하는 편이에요."

-승부 근성에 대해선 어떤가요?

"하하하. 저희집 애들이 좀 밝아요. 집에선 미스코리아 봉 들고 같이 춤추고 놀지만, 밖에 나가면 또 넘치는 행동은 안 하죠. 해야 되는 건 끝까지 열심히 하는 편이지만, 아닌 것 같으면 되게 빨리 포기해요."

-김지운, 최동훈 감독과 ‘장화홍련'과 ‘범죄의 재구성’을 한 이후론 무엇이 달라졌지요?

"김지운 감독과 최동훈 감독을 보면서 연출을 잘하는 게 뭔지 알았어요(웃음). ‘장화홍련'의 새엄마와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이라는 옷을 입을 때,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죠. 아! 이렇게 캐릭터가 사는구나… 그동안 영화계가 정말 세련되어졌네(웃음). 제가 1992년 ‘재즈바 히로시마'로 데뷔를 했어요. 일본 사람으로 나왔는데, 당시에 미스 인터내셔널에 나가야 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이 더빙을 했다니까요(웃음)."

애초에 신비한 이미지나 부러 감출 만한 패를 쥐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키 큰 고양잇과 여배우가 도도한 몸태를 지우고 마트의 계산원으로 출연했던 2014년 영화 ‘카트'는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자 반전이었다.

캐셔 유니폼을 입고 파마머리를 찰랑거리며 물건을 나르고 바코드를 찍던 염정아, 군소리 없이 연장근무를 하다 해고된 후, 거리에서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이던 악바리 염정아는 대치동 학원가를 종종 거리며 뛰어다니던 2019년의 염정아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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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2014년)'에서 마트 노동자의 피로한 얼굴과 몸짓을 사실적으로 연기한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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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는 의외의 필모그래피예요. 생활의 곤궁이 묻어나는 캐릭터에 어떻게 몸을 맞췄습니까?

"한 장면 찍을 때마다 머리 터지게 고민했죠. ‘마트 아줌마'는 완전히 처음이라… 그 직업을 사는 것처럼 몸을 맞추느라 애썼는데, 끝날 때야 좀 편해지더라고요(웃음)."

-고 김영애 씨와 드라마 ‘로열패밀리'와 영화 ‘카트'를 함께 했지요? 요즘 정아 씨 얼굴에서 김영애 선생의 얼굴이 겹쳐보여서 놀랐어요.

"요즘 그런 얘기를 들어요. 김영애 선생님 닮았다고. 많이 좋아했어요. 그분은 제겐 둘도 없는 친구였죠. 연기에 대한 열정은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이미 대가이신데도 어린 배우들 연기 보고 진심으로 감탄해요. "정아야, 나도 쟤처럼 잘하고 싶어!" 하시면 저는 "세상에, 선생님이요?" 놀라서 되묻곤 했어요. 이젠 제가 그 역할을 해야죠. 겸손하게 딱 연기만 보고서."

나이 먹으니 이제 ‘구로동 샤론 스톤'같은 연기는 못하겠노라고 했다. 새 영화 ‘뺑반'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경찰 역할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 감독은 잘했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도 스스로는 ‘멋있는 척하기’가 쑥스러웠노라고. 그가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쑥스럽다'였다. 칭찬받는 것도 멋있는 척하는 것도 쑥스럽긴 매한가지라고. 그 자신, 엄마로 살아가고 있으니 ‘보통 엄마 역할이 가장 자연스럽지 않겠냐'고. 이젠 치명적인 멜로 같은 건 절대로 못 하겠다고 정직하게 엄살을 떠는 염정아.

숟가락을 데워내듯 따스한 입술에서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배우의 꿈을 꾼 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고. 예쁘장한 십 대 소녀는 연극반 입단 시험에서 뇌종양에 걸린 소녀를 연기해 기립 박수를 받았다. "펑펑 울면서 몰입을 했어요. ‘제가 죽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하면서. 그런 열연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코미디야(웃음). 또래 중학생들끼리 진지하게 손뼉 치고. 하하."

계획대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지만, 정작 무대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소품 팀이 끝이었다. "미스코리아(1991년)에 당선되자마자 ‘우리들의 천국'이란 드라마에 투입이 됐거든요. 아쉽게도 그때 어떻게 연기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미스코리아 출신 여배우라서 저평가됐다고 생각하나요?

"하하. 제겐 너무 옛날 일이예요. 20대까지는 한국 대표 미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어요. 기록이 남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예쁘고 밉고가 어딨나요? 배우니까 관리를 잘해야겠지만, 예쁜 배역이 사실 재미는 없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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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릅 뜬 눈, 앙다문 입술. 클로즈업을 잡을 때도 풀샷을 잡을 때도 신체의 모든 세포에 빈틈없이 감정을 채워넣는 염정아만의 밀도 높은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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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드리 헵번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기분은 좋지요?

"(손사래를 치며)그것도 다 홍보팀의 농간이야. 하하하. 커트 머리에 허리가 잘록한 옷을 입었더니 콕 집어 ‘염드리 헵번'이라고. 아유, 그런데 난 예쁜 옷은 불편해요. 지금 옷차림이 좋아요. 셔츠에 팬츠, 운동화 정도요."

-배우로서 염정아만의 매력은 뭔가요?

"제가 표정이 정말 많아요. 생각과 감정이 여러 느낌의 얼굴로 배어 나오죠. 배우로서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를 좋아했지요?

"줄리아 로버츠요. ‘귀여운 여인'에 나올 때부터 정말 좋아했어요. 줄리아 로버츠가 하면 어떤 드라마도 다 진짜 같고 몸에 확 와닿는 게 신기했어요. 그렇게 연기하고 싶었어요. 송강호 선배는 최고죠. 김윤석 선배도 우러러보곤 했는데, 첫 연출작 ‘미성년'에 감사하게도 저를 아내로 캐스팅해주셨어요."

-운이 안 풀린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지냈나요?

"전 친구도 많지 않아요. 가족들하고 지지고 볶았죠.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면서, 일에 대한 애절한 마음도 유지했어요. 그러면 지금처럼 바쁠 때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게 되더라고요(웃음)."

-자존감이 높아질 때는 언제인가요?

"연기로 칭찬받을 때 가장 자존감이 높아지죠. 그리고 자고 있는 애들 보면서 (손을 높이 들며)‘와! 키가 이렇게 크네’하고 만져질 때요. 저는 제가 애들을 낳고 키우고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좋아요."

꽃봉오리가 터지듯, 아이들만 생각하면 환희에 찬 표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엄마를 뭐라고 하나요?

"웃긴 사람이래요. 재밌는 사람이라고. 제가 하는 몸짓을 보고 많이 웃어요, 우리 애들이. 어디 가서 너희들도 쑥스러워하지 말라고, 제가 앞서서 막 몸개그를 하거든요. (좋아 죽겠는 표정으로)저희 딸은 커서 작가가 되고 싶대요. 큰 애가 글을 잘 써요. 상상력도 풍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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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학습지 광고에 대해 물었더니 “불편해하시는 분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 애들도 하고 있어서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자기 생각에 빠질 때의 새초롬한 표정의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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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요?

"참 이상한 게 저는 자주 행복해요.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껴요. 애들과 남편을 보면 행복하고 연기 잘 될 때 행복하고, 좋은 대본을 볼 때 행복하고, 맛있는 거 먹을 때, 친구와 깔깔거리며 전화 통화할 때 눈물 나게 행복해요."

-스트레스가 몰려올 땐 어떻게 하죠?

"남편과 와인을 마셔요. 제겐 소중한 힐링 타임이에요. 애들 얘기, 영화 얘기, 인생 얘기 두루두루 다 나눠요. 남편은 역사 얘기할 때 가장 신이 나요. 세계 지도까지 그리면서 설명하면 저는 또 눈을 빛내고 들어줘요."

-아이들이 크면 엄마를 어떻게 기억했으면 싶습니까?

"그 말 들으니까 나, 막 슬퍼지려고 해…(웃으며) 불쌍한 엄마 아니고 멋있는 엄마요. 우리 엄마는 밖에 나가면 일도 열심히 했고 우리한테도 최선을 다했어, 그러면 좋죠. 아냐, 아냐. 그냥 난 ‘엄마가 너무 좋아' 이 한마디면 족해요."

대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으면 저렇게 화사해질 수 있을까.

여배우는 꽃이라는 환상을 깨고 잡초와 잡초 아닌 것의 구분 없이 오직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을 꽃피운 여자. 샤론 스톤이 아니라 ‘구로동 샤론 스톤'으로 캐슬의 여왕이 아니라 ‘아갈머리 미향'으로. 팜므파탈이든 생존형 아줌마든 어쩌면 염정아가 지닌 힘과 매력은 이토록 지치지 않고 충전되는 ‘자기충족성'에서 나왔다.

-20대와 30대, 40대를 거치면서 어떤 점이 달라졌습니까?

"20대는 튀고 화려한 걸 좋아했어요. 좀 새침했고, 밥을 정말 많이 먹었어요(웃음).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는 좋은 시절이었죠. 30대는 연기의 맛을 알았어요. 일하는 게 정말 재밌었고 좋은 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40대는 엄마가 돼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50대는 더 편안해지겠지요."

-드라마 ‘스카이캐슬’ 끝났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에요. 계층 사다리와 ‘입시 지옥'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예상외로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까지 ‘예서 책상' 같은 ‘스카이캐슬'의 욕망이 스며들고 있더군요. ‘스카이캐슬'에서 나온 후 당신은 어떤 교훈을 얻었나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한서진을 보면 그녀의 과함 때문에 불행이 생기고 많은 사람이 괴로워했잖아요. 교육 문제도 한 사람이 가진 여러 인격도 겉과 속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고 자기만의 중심을 지켜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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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정아는 변화무쌍한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특이한 성공신화를 이뤄냈다. 자기 삶을 긍정하는 현실주의자의 저력을 보여주는 염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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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간 스포트라이트가 없을 때도 그녀가 세트장 어디에선가 계속 연기 중이었다는 게 고맙다. 꿈 없이 안주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꾸준히 성실하게 살아내면서. "남들이 저더러 잘 안 풀린다고 할 때도 저는 몰랐어요. 방송국 오가면서 나이 드신 연기자 선생님들 곁에서 좋은 말씀 들으며, 그 울타리 안에서 연기하는 게 그냥 좋았어요."

과거에 대한 후회 섞인 가정법이 없는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염정아의 에너지는 누수가 없다. 자주 행복해했고 알맞게 감사를 표현했으며, 터틀넥 위에 겹쳐 입은 실크 블라우스에선 평온의 광채가 흘러넘쳤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동안, 염정아라는 여자도, 그리고 여배우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다.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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