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다문화칼럼 함께하는세상] 다문화사회에서의 산후의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세계일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에는 통과의례(通過儀禮)가 있다. 인류학에서는 그것을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거치게 되는, 출생·성년·결혼·장사(葬事) 등에 수반되는 의례’라고 한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그 구체적 형태는 나라, 지역, 시기에 따라 제각각이다.

산후의례는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지는 통과의례의 하나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는 금줄을 치고 고추나 숯을 걸어 아기의 탄생을 알렸다. 왼새끼를 꼬아 대문에 건너질러 맨 금줄은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게 하여 전염병과 귀신 등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고 믿었다. 즉, 금줄은 산모와 아기를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세이렛날에는 금줄을 걷고 일가친척과 가까운 이웃에게 아기를 보임으로써,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 친족과 공동체에 통합되는 의례를 치렀다.

중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난 집의 사람이 이웃 사람들에게 빨간색 달걀을 건넸다. 빨간 달걀은 기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 아기를 무사하게 보살펴 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기능은 유사하다. 어쨌든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금줄을 보기 쉽지 않다. 집이 아니라 병·의원에서 아기를 낳는 경향이 증가하였고, 아파트와 다세대·다가구주택 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주거문화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1990년대 이후 퍼진 산후조리원은 집에서 행하던 산후의례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하지만 세이레 동안 산모가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는 풍습은 지속하고 있다. 특히 산모는 미역국을 즐겨 먹는다. 미역국은 피를 맑게 하고 혈액 순환에 도움을 줘, 산후조리뿐 아니라 유선(乳腺) 분비를 원활하게 하여 모유 수유에도 좋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산모는 돼지족발에 당근과 감자를 푹 고아서 만든 ‘까잉’ 또는 ‘깐’을 먹는다. 지방마다 발음이 약간 다르지만 같은 음식이다. 산모의 영양에 도움이 되고 모유를 더 풍성하게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는 산후조리 음식으로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또 베트남 사람은 짠 음식이 산모와 아기에게 좋다고 생각하여 꺼리지 않는다.

한국과 베트남에서는 공통으로 산모가 차가운 음식을 피하고, 아기를 자랑하거나 칭찬하는 행동은 기피 사항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서양 여성들은 출산 후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고, 아기를 자랑하고 칭찬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세계일보

설동훈 전북대 사회과학연구소장


국내 여성 결혼이민자 중에서 출산 후 미역국으로 가족과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산후 보양식으로 돼지족발을 선호하는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이,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이유로 미역국으로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남편이나 시집 사람들이 미역국을 강요했을 때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문화에는 우월과 열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좋거나 나쁜 문화도 당연히 없다. 다문화사회에서는 여러 문화가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주류 문화’를 형성하는 지배집단이 소수자 집단에 자신의 생활양식을 강요한다고 해서 먹히는 상황이 아니다. 상호 이해와 신뢰에 바탕을 둔 소통이 없으면 ‘가족 내 갈등’이 ‘사회 갈등’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과학연구소장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