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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조연경의행복줍기]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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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대학생이 된 아들은 스키장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불쑥 현관에 놓인 아버지의 낡고 볼품없는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놓인 동생과 자신의 운동화는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유명메이커 제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좋은 것, 새것이 별로 없다. 옷장 안에 걸려 있는 옷 중에 혹한의 겨울 날씨를 견뎌낼 수 없는 건 아버지의 오래된 싸구려 코트뿐이었다. 순간 스키장의 눈을 치우면서 스키를 즐기러 온 또래들이 부러워서 아버지를 원망한 게 몹시 부끄러웠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한평생 일만 하면서도 가족에게 더 많은 걸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아버지. 어쩌면 이 땅에서 아버지로 산다는 건 설탕을 뺀 커피 맛처럼 달콤함은 배제된 것인지 모른다. 아버지란 그렇게 힘든 이름이다.

고3 수험생 딸은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거실로 나왔다. 엄마가 TV를 켜놓은 채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졸고 있다. 밤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딸 때문에 마음 편히 잠들 수 없고, TV 소리가 방해될까봐 볼륨을 줄이고 눈으로만 TV를 보는 엄마. 그 엄마를 무식하다고 툭하면 타박을 놓고 꼬불꼬불 파마머리를 하고 다니는 엄마가 촌스러워 부끄러워한 적도 있다. 파마 값을 아끼려고 멋과는 상관없이 늘 라면머리를 하고 다니는 엄마.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의 헌신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바람 부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맨살의 겨울나무처럼 엄마란 그렇게 안쓰러운 이름이다.

잔칫집에 가면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살랑살랑 음식을 나르며 “많이 드세요” 하는 사람이 인기를 끌고, 수고한다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듣는다. 그러나 푸짐한 음식상은 묵묵히 부엌에서 기름때 묻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땀을 흘리며 쉬지 않고 전을 부치는 수고의 손길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 나서서 생색내는 사람을 기억한다.

한 회사가 잘되는 건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직원 덕분이고, 우리가 안전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건 시민의 편리함을 위해서 늦은 저녁, 이른 새벽을 골라 일하는 환경미화원 덕분이고, 이 사회가 멈추지 않는 시계처럼 잘 돌아가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수많은 자원봉사자 덕분이다. 세상에는 당연한 건 없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누리고 있다면 누구 덕인가를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올 한해에는 묵묵히 자신의 맡은 소임을 다 해내고 있는 사람, 소리 없이 궂은일을 하는 사람, 관심밖에 소외된 사람, 그런 사람이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고 그 안에 일원인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려면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많이 누리는 사람이 베풀고, 먼저 손 내밀고 고개 숙이고 겸손해야만 된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골고루 찾아오는 아침 햇살 같아야 더욱 빛난다.

조연경 드라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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