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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4)아침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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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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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시집 <작은 위로>에서

날마다 기상종 소리에 잠을 깨지만 때로 새소리에도 잠이 깨는 수도원의 아침. 나의 침실에선 소나무가 잘 보여 방 이름을 ‘솔숲 흰구름방’이라 이름 짓고, 소나무의 영성을 자주 묵상하곤 합니다.

매일 걸어가는 삶의 길에서 착한 것만으로는 왠지 좀 부족하고 참된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함을 갈수록 더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내가 잘한다고 한 일도 오해의 근원이 될 땐 너무 힘든데 어찌하면 좋지요?’ ‘오늘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나에게 순간 지혜를 주세요.’ 소나무를 바라보며 기도하곤 합니다.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견디어내는 인내심, 한번 맹세한 사랑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충성심을 사계절 늘 푸른 소나무를 보며 배웁니다.

나는 비누를 많이 묻히는 세수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물에 풀리는 비누의 향기를 사랑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순하게 녹아내리는 비누처럼 온유함의 덕목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무언가에 잔뜩 화가 나 있고 분노로 가득 찬 이들의 표정을 보는 건 괴로운 일입니다. 참아도 좋을 사소한 일에 세상 끝난 듯이 흥분해 옆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슬픈 일입니다.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내고도 사과는커녕 변명과 자기합리화에만 급급한 이들을 보는 일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살아오면서 제일 후회되는 일 중의 하나는 동료나 친지에게 필요 이상으로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고도 즉시 용서를 청하지 않은 잘못입니다. 화를 내고 나면 후회할 줄 뻔히 알면서도 참지 못하는 성급함으로 일을 그르친 적이 내게도 얼마나 많았는지요. 나이가 들면 더 느긋하고 유순해져야 하는데 반대로 성급해지고 거칠어지는 성향을 발견할 적마다 스스로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날 밤의 꿈이 평화스러울 수 있도록 하루를 보내라.’ ‘너의 노년이 평화스러울 수 있도록 젊은 날을 보내라.’ 어려서 마음에 새긴 경구를 기억하면서 올 한 해는 좀 더 온유한 마음을 지녀야지 결심해 봅니다. 며칠 전엔 서울 출장을 갔다가 서울역 편의점에서 <채근담>을 한 권 샀습니다. ‘담백한 고전 속에서 만난 위대한 삶의 지혜’라는 부제가 붙은 <채근담>을 읽으면서 마음을 더욱 맑고 담백하게 갈고닦으려고 합니다.

선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때로는 희생의 아픔을 경험하고 자아포기의 내려놓음에서 오는 눈물을 흘려야 할지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겸손과 온유함의 덕목. 새해엔 좀 더 분발해 순하게 걸어가는 믿음과 인내의 순례자가 될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내적 투쟁에서 승리해 웃을 수 있는 평화의 일꾼이 되길 기도합니다. 어느새 곱게 피어 향기를 날리는 매화 나뭇가지 위에 앉은 이른 봄의 햇살이 ‘잘해보세요!’ 하며 축복해 주는 이 아침, 아직 살아있음을 고마워하며 모든 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행복한 아침입니다.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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