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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조호연 칼럼]초계기 논란, 고백도 참회도 없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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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21일 돌연 ‘초계기 위협비행-레이더 조준 갈등’에서 ‘휴전’을 선포했다. 일방적으로 협의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사태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주장에 허점이 보이자 교묘한 언설로 책임을 한국에 떠넘기며 봉합해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일본 측은 협의 중단에 대해 “한국 측이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할 자세를 보이지 않아 협의를 계속해도 진실규명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경향신문

한국 군함의 일본 초계기 레이더 조준은 객관적 사실인가. 아니다. 객관적 사실은 충분한 증거가 뒷받침되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받아야 성립된다. 일본은 사태 현장을 담은 동영상과 초계기의 전자파 접촉음을 증거로 제시했지만 둘 다 사실 입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영상에는 “한국 군함에서 추적 레이더가 나오고 있다”는 초계기 승무원 발언과 “우리를 향하는 한국의 추적 레이더를 감지했다”는 초계기 기장의 발언이 나온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제시되지 않았다. 객관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일본 측이 추가 증거로 제시한 초계기의 전자파 접촉음 역시 탐지일지, 방위각, 전자파 특성 등이 첨부돼 있지 않다. 그러니 “실체를 알 수 없는 기계음일 뿐”(국방부 평가)일 수밖에 없다. 일본이 객관적 사실이 아닌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는 것은 억지다.

그렇다면 일본 초계기의 한국 군함에 대한 위협비행은 어떤가. 일본 측 동영상을 보면 초계기는 한국 군함의 옆구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공격적 기동으로, 명백한 도발행위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과거 쿠바 해상봉쇄 때 미군기가 러시아 선박의 측면으로 파고들며 위협하는 사진을 연상시킨다. 공격의사가 없다면 선박과 나란히 비행하면 된다. 초계기가 군함으로부터 500m 거리에서 150m 고도로 근접비행한 것부터 결코 정상적인 초계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 일본은 위협비행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선 구조활동 중인 군함에 왜 그렇게 가까이, 그리고 측면에서 접근하는 비행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고 있다.

사실 당시 초계기의 활동 전체가 의문스럽다. 일본 측 동영상을 보면 초계기가 위협비행을 하면서 육안으로 군함의 어선 구조 상황을 파악한 승무원이 특이사항이 없다고 복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초계기의 임무는 끝난 것이니 귀환하면 될 터인데, 선회한 뒤 다시 군함 쪽으로 다가와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촌각을 다투는 어선 구조작업 중인 군함을 자극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오히려 일본 초계기가 북한 어선 구조활동을 도왔다면 한국과 갈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좋은 신호가 되었을 것이라 본다. 당장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북한의 신뢰 기억의 창고에 저장될 것만은 분명한 일이었다. 물론 다 지나간 이야기다.

애초 이번 사태는 양국이 실무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그에 따라 뒤처리를 하면 그만일 사안이었다. 일본이 아베 신조 총리까지 나서서 문제를 키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사실관계 확인은 소홀히 한 채 국내외를 상대로 여론전만 벌였다.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호도해 국제사회에 공표하고,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하기도 했다. 한국은 양국 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증을 하자고 요구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았다. 문제 해결보다 갈등 조장을 목적으로 한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감소하자 새로운 군사적 위협을 제기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군사력 증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불만이 이번 사건에 투영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이 이번 사태에서 운요호 사건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는 측량 명목으로 조선 해안에 침투해 조선군의 공격을 유도한 뒤 이를 빌미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현대의 민주국가 일본은 제국주의 일본과 전혀 다르지만 트집과 억지로 주변국을 흔드는 행태는 놀랍게도 닮아 있다. 일본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의 저자 이어령은 일본에는 고백은 있으되 참회는 없다고 말했다. 지금 일본에서는 고백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은 이번에 신뢰 자산을 크게 잃었다. 향후 갈등이 불거졌을 때 일본이 순리대로 대응할 것이라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보수 우경화와는 별개의 문제다. 경제대국 일본의 위상은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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