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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함인희의세상보기] 작은 장례식의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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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친족·지역 공동체 규모 줄며 / 거품 뺀 장례 문화 차츰 스며들어 / 日선 죽음 준비하는 ‘슈카쓰’ 확산 / 가보지 않은 길 우리도 준비해야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지난해 여름, 하루가 멀다 하고 주위 어르신의 부고(訃告)가 날아들었다. 때 이른 겨울 한파를 넘기는 동안에도 유난히 많은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난주만 해도 다섯 분의 부음(訃音)을 접했다. 이제 어르신들 떠나보낼 때가 된 내 나이 탓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인구의 14% 이상이 65세 이상 노년층으로 구성된 고령사회로 진입한 탓이 더 클 것 같다.

가족 의례 가운데 여전히 전통적 요소를 고집하며 변화에 저항해온 것이 장례식이라 생각해 왔는데,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장례 절차에도 드디어 의미 있는 변화가 일기 시작한 듯하다. 작은 결혼식의 뒤를 이어 작은 장례식이 서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기에 드는 생각이다.

세계일보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얼마 전 가까운 친구의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곤 황급히 장례식장을 찾았다. 찾아오는 문상객이 예상외로 적어 많이 걱정스러웠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해도 풀리고 마음도 놓였다. 7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지내시던 친구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당신의 장례식을 손수 준비하셨다 한다.

일단 당신이 입던 옷가지, 장롱 속 이불, 부엌 식기 중 꼭 필요한 것만 남기시곤 나머지는 달라는 곳으로 조금씩 나누어 보내셨고, 아끼던 패물 몇 점은 정성껏 포장해서 딸 며느리 손녀에게 물려주셨다 한다. 기타 물건은 종이 박스에 담아서 ‘나눠 주어도 좋은 것’, ‘버려도 좋은 것’, ‘태워도 좋은 것’ 등의 설명을 붙여 한 곳에 정리해두셨다 한다.

그런 다음 특별히 당신 장례식은 “주위에 민폐 끼치지 말고 조촐하게 해 달라” 신신당부하시며 당신이 꼭 부르고 싶은 분 이름과 연락처를 며느리에게 전해주셨다 신다. 수의(壽衣)는 따로 준비해두지 않으셨는데, 수의 한 벌 가격이 너무 비싼 데다 지금은 그다지 의미가 없으니 당신이 아끼던 한복을 입혀달라고 부탁하셨다 한다. 그리곤 매장(埋葬)은 마다하시며 아들딸 내외가 가끔이라도 들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수목장(樹木葬)을 해달라셨다는 이야기였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규모가 작아지고 형식도 간소화하고 있음은, 가족 의례를 둘러싸고 존재해왔던 고질적인 허례허식의 거품이 걷히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단은 반가운 일이라 생각한다. 반면 친인척 간의 왕래가 번화했던 예전에 비해 오늘날은 교류하는 친인척 범위가 눈에 띄게 축소됐고 친족의 위상과 의미 또한 예전 같지 않기에,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모셔야 할 집안 어른이나 친인척이 희소해짐에 따라 작은 결혼식이나 작은 장례식이 선호된다는 점에서는 일면 아쉽기도 하다.

와중에 우리보다 앞서 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에서 오늘날 ‘슈카쓰(終活)’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귀가 솔깃해진다. 슈카쓰라 함은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활동의 줄임말인데,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슈카쓰가 활성화한 데에는 일본 가족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상황 변화가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 저출산 국가인 일본에서는 자녀가 하나 혹은 둘 뿐이거나 아예 없는 부부도 흔한 데다 평생 비혼으로 남거나 이혼 및 사별로 인해 다시 싱글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모의 장례식을 치르고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은 자녀에게 크나큰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는 부모가 증가하면서, 슈카쓰가 활성화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과거에는 친족관계 이외에도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가 건재했지만 오늘날은 지역 공동체가 확연히 약화했고 지역사회 내 교류도 희소해지고 있음도 슈카쓰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생전장례(生前葬禮)’를 치르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생전에 인연을 맺었거나 신세를 졌던 지인(知人)을 초대한 후 일정한 예를 갖춰 이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장례식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되지만 자신이 직접 준비한 생전장례식에는 본인이 상주로 참가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장례식을 치른다고 한다.

덕분에 대부분의 생전장례는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일반 장례식과 달리 다양한 이벤트가 이루어지기도 한단다. 이 자리에서 노래경연대회를 하기도 하고, 조촐한 파티를 열기도 하며, 자서전을 출판하는 기념식 등이 자주 활용되는 방식이라 한다. 본인이 사망한 후에는 가족들 주관하에 재(再)장례식을 치르는 경우가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슈카쓰나 생전장례가 유행하고 있다 함은 머지않아 인구의 20%가 65세 이상 노인층으로 구성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게 될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큼은 물론이다. 고령사회든 초고령사회든 우리 모두에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분명하다. 이제 가족 및 친족 규모도 축소되고 친인척 간 교류도 희소해지고 삶을 공유하는 지역 공동체도 붕괴한 상황에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은 이를 보내드리는 의례 또한 그에 걸맞게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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