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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야! 한국사회] 물에 빠진 기억 / 박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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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고등학교 1학년 설악산 수학여행. 계곡에서 헤엄치던 친구가 들어오라고 했다. 수영을 못한다고 했더니, 물이 얕다고 했다. 물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발이 닿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며 가라앉다가 다른 녀석의 도움으로 겨우 물 밖으로 나왔다. 그날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물이 두렵다.

1998년 민주노총의 기억. 1997년 12월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노동계는 기대에 부풀었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사항인 ‘노동유연성 제고’를 법제화하는 대가로 노동자를 위한 과제를 논의하자고 했다. 1998년 1월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다. 생활보호대책, 기업 경영투명성 제고, 노동기본권 보장 등 무려 100여개 과제가 논의됐다. 하지만 정부의 목적은 정리해고·파견법 도입일 뿐, 노동자를 위한 정책은 기한이 없거나 실효성 없는 말잔치에 불과했다.

2월6일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67.6%라는 압도적 반대로 노사정 합의를 부결했다. 지도부 총사퇴 후 구성된 비상대책위는 재협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외면했다. 정리해고와 파견법은 빛의 속도로 제정됐고, 보상으로 단체행동권 없는 반쪽짜리 교원노조법이 던져졌다. 현대차를 시작으로 만도, 롯데호텔, 대우차 등 파업현장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구속된 노동자가 역대 최대, ‘친’노동 정부는 어느 정권보다 가혹했다.

노무현에서 박근혜까지 노사정 대화를 요구했지만 민주노총은 거부했다. 노사관계 선진화, 경제위기 극복 노사민정, 노동시장 구조개혁. 철 따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결과는 같았다. 비정규직법, 복수노조 창구 단일화 등 ‘재벌 청부’ 법안은 ‘논스톱 통과’였고, 헌법과 국제기준을 준수하는 ‘노동 존중’ 법안은 ‘무기한 대기’였다. 박근혜는 해고자를 내쫓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불법 딱지를 붙여 사회적 대화의 희미한 흔적마저 지웠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교조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양승태 대법원 재판거래, 국제기구 권고 등 전교조를 정상으로 되돌릴 근거는 차고 넘쳤다. 그런데 정부는 온갖 핑계로 2년을 보내더니,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체결 뒤로 또 미뤘다. 그러면서 ‘노동 존중 정부’를 믿고 노사정 대화에 참여하란다.

민주노총이 28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여부를 결정한다. 김명환 위원장은 “경사노위 참여가 불발되는 경우를 가정한 ‘플랜 비(B)’는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금속노조가 반대 입장을 내는 등 현장 분위기는 만만찮다.

민주노총 간부들은 머리에 뿔 달린 ‘과격 용공 분자’가 아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은 연봉도 높고 든든한 노조도 있다. 상여금을 없애고 탄력근로를 확대해도 단체협약을 통해 막으면 된다. 대화에 참여해 적당히 타협하면 지긋지긋한 귀족노조 비난도 잦아든다. 그런데도 대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정부를 믿고 강을 건너다 물에 빠진 기억 때문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사용자들이 떼쓴다고 정부여당이 공약에도 없는 탄력근로 확대를 2월 안에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태안화력 김용균씨의 유언인 비정규직 100인 대표단과 대화를 외면하고, 정경유착 범법자들과 파티를 즐겼다. 재벌은 영빈관에 모셨고, 김수억 비정규직 대표는 유치장에 가뒀다.

대통령이 노동자를 ‘들러리’가 아닌 ‘파트너’로 여긴다면 신뢰의 증표를 보여주면 된다. 강을 건너다 빠진 트라우마를 극복할 조처. 노조 밖 사람들 월급 빼앗고 과로사시키는 탄력근로 확대를 철회하고, 전교조를 원상회복시키면 된다. 이 정도 신뢰조처도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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