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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세상 읽기] 어느 노조혐오 문서 /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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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검찰청과 법원을 오가는 문서들은 컨트롤+C(복사하기)와 컨트롤+V(붙이기)의 향연이다. 긴 문장을 한참 읽다 보면 주어를 다시 살펴야 한다. 어느 순간 주어가 바뀐 경우도 많다. 이는 대부분 복붙(복사해서 붙이기)의 폐해다. 배운 분들이 해도 너무하네! 싶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느 구속영장의 복붙 내용이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1월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보낸 피의자 김수억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를 보자. “김수억은 비정규직 그만 쓰개!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 소속 회원이자 문재인 대통령과 대화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100인 대표단 소속 회원인 자이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 신무문 앞에서 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된 대통령 관저의 경계 지점 100미터 이내에서 옥외집회를 주최하였다.”

그의 죄명은 미신고 집회 외에도 서울지방고용노동청과 대검찰청 건물 침입, 퇴거 불응, 청와대 사랑채 앞 효자로 전 차로 점거 등 다른 것들도 있다. 구속을 필요로 하는 주거, 도주 우려, 증거 인멸 등 이유도 기재돼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흔히 보았다. 문제는 다음 대목이다. 구속을 필요로 하는 소결의 일부 내용이다.

“대통령과 정부 및 정치권에서도 ①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더 이상 사회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처럼 약자일 수는 없어 민주노총이 상당한 사회적 책임을 나눠야 한다.” 이 말은 지난해 11월6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한 말이다. “② 당 최고위원, 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민주노총은 대한민국의 법치와 경제를 망치는 암적 존재….” 같은 달 14일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이 자기 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한 말이다. “③ 어떤 집단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타인에게 상해를 입힌다거나 기물을 파손한다면 철저히 책임을 물을 것. 민노총이기 때문에 손을 못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특정 집단이 삼권을 다 좌지우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회 행정안전위에 출석하여 한 말이다.

“대통령과 정부 및 정치권에서도”로 시작하는 문장은 절묘한 복붙으로 김수억 피의자에 대한 구속 의견을 소명한다. 누군가의 행위가 법률을 위반했다면 따지면 된다. 그런데 글들 행간에 노조혐오가 넘실대는데, 나만 그렇게 읽었나? 청와대 비서실장과 장관들, 심지어 야당 의원의 말까지 동원한 검사의 소견은 그렇게 읽힌다. 노조 없는 노동존중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고, 백번 양보해 노조혐오가 아니라 민주노총에 대한 문제의식이라 치더라도, 민주노총 없이 한국 사회 노동존중의 길을 어떻게 열려고 하나.

1989년에 19.8%이던 노조 조직률은 30년 사이 반토막이 났다. 한국 사회에서 노조 할 권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다. 이런 마당에 정부, 정치권, 검찰까지 한목소리로 민주노총과 노조를 향해 혐오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정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 유무를 다투면 된다. 그러나 지금 저 구속영장의 내용은 어떤가? 김수억의 행위와 민주노총에 대한 입장이 지난 정부 이래 국정을 농단하고 재판을 거래하며 삼권분립의 기반을 뒤흔든 어떤 적폐한테보다 단호하게 보인다.

우리 헌법 제33조는 “①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만 이해한대도 할 수 없는 말을 끝없이 뱉고 복붙하는 지금의 권력들에게 일러주고 싶다. 정말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건 노조가 아니라, 노조를 혐오하는 그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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