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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파편화된 미디어와 갈라진 우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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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더리더 안민호 기자]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머니투데이

대개 새해에는 희망찬 기대뿐만 아니라 조심스러운 경계의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된다.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만, 새해를 핑계 삼아 우리가 당면한 새로운 양식의 위기에 대해 한번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경제도 아니고, 안보 문제도 아닌, 우리의 어떤 기억에 관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 필리핀 해역에서 미국의 군함이 격침된다. 생존자들은 군함파편에 의존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된다.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5일 안쪽, 그 마지막 순간에 표류 군인들은 미국 깃발을 단 군함 한 척을 발견한다. 기쁨에 소리치고 손을 흔들지만, 군함은 그들 주위를 돌 뿐 구조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군함에서 한 명이 나와 당신들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승선했던 군함의 이름과 소속을 큰 소리로 외친다. 그래도 군함은 여전히 원을 그리며 돌 뿐 경계를 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욕설을 군함을 향해 퍼붓는 와중에 군함에서 한 사람이 나와 다시 묻는다.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어디요?” 묻자마자 표류자들 모두가 함께 소리 높여 답한다.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즈.” 그때서야 군함에서 밧줄이 던져진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내용이다. 공통의 기억과 ‘우리’ 의식에 대해 강의할 때 곧잘 언급하는 사례다.

공통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묶어주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수단

사람이란 게 따지고 보면 기억의 산물이다.


과거와 그 기억이 있어야 현재의 나도, 우리도 가능하다. 가족이 가족인 것은, 친구가 또 친구인 것은 그들이 과거의 어떤 시공간을 공유하고 그 축적된 기억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이곳에서 그때, 그곳을 회고하고, 재구성하는 우리의 많은 행위는 중요한 의례적 의미를 갖는다. 연말연시에 바쁜 시간을 쪼개 미처 만날 수 없던 이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가족끼리 모여 생일을 축하하고 성묘나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는 것도, 또 조직에서 창립기념일 등 다양한 기념일을 두고 공통의 이벤트를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도 다 그런 것들이다. 의례는 공통의 기억을 확증하고 견고하게 만들며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세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월드시리즈나 코리안시리즈도 그런 중요한 사회적 의례의 일종이다.

정치적 프로젝트로써의 공통의 기억 만들기

공동체는 공통의 기억과 그것에 대한 믿음, 즉,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과, 그런 믿음에 바탕해 추론되는 유형화된 공통적 행위양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 기초한다. 그런 믿음과 인정은, 내적 동질성과 외적 이질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우리’라는 심리적 연대와 집단 정체성을 완성한다. 국가적으로도 이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공통의 기억이 없다면, 국가도 불가능하다. 국가적 기념일이나, 기념 건축물, 공적 명명 등과 같은 다양한 공적 의례를 통해 국가는 이런 공통의 기억을 구성하고 일반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공동체의 과거에 관한 공적 기록인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다. 공통의 기억 만들기 프로젝트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에서부터, 친구관계, 학교, 직장, 클럽, 그리고 국가, 민족 수준에서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단위에서 진행되는 광범위한 사회소통 행위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권력과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불가피한 매우 정치적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기억을 확증하고 공유하는 미디어

공통의 현실과 경험, 공통의 기록, 공통의 해석, 공통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회 소통과 정에서 가장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대중매체다. 공통의 경험이란 것이, 어떤 실체를 가진 물리적 경험일 필요는 없다.

실제 경험 여부와 상관없이 ‘경험했다는 기억’이 더 중요하다. IMF 외환위기를 경험 했다고 생각하는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실제로 그것을 경험한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IMF 외환위기로 상징되는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공통의 기억이 꼭 공통의 경험에 기반하지 않을 수 있음은 간접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중매체 덕분이다. 문제는 다른 볼 것이 별로 없던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하나의 공동체가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대중매체가 힘을 잃어버린 SNS와 유튜브로 상징되는 이른바 정보 과잉의 시대에는 그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의 불확실성 그리고 가짜 뉴스

매체 철학자 노베르트 볼츠가 지적한 것처럼 확실한 것은 정보적이지 않고 정보적인 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정보의 과잉은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증대한다. 확실성의 부재는 개별적이고 차별적인, 고유한 것들을 그럴 듯하게 만든다. 하나의 정보와 해석에는 항상 그와 반대되는 정보와 해석이 병존한다. 이런 서로 대립하는 수많은 정보와 해석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판단할 시간과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결국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판단과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불가피하게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결정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파편화된 정보와 해석, 그리고 각기 다른 신뢰원에 의존하는 시대, 그래서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콘센서스가 매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가짜 뉴스 문제란 것도 결국 이런 시대의 반영이다.

2017년 1월의 기억

2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17년 벽두에 박대통령은 갑작스러운 기자 간담회를 열고, 그 유명한 “나를 완전히 엮은 것” 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대부분은 실소했고, 또 분노했다. 박 대통령의 말에 동의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못했고, 결국 대통령은 쫓겨났다. 컨센서스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촛불 혁명이라 불리는 2년 전의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해 법적인 판단과 해석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2년 전 그 사건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하나의 공통된 기억, 심리적 연대를 구성하는 데 성공적이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공적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앞서 말한 것처럼,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현재적 권력과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는 사회적 소통의 결과다. 우리가 촛불과 탄핵에 대해 하나의 지배적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현재적 권력이 주도하는 담론의 불안정성과 파편화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의 공적 의사소통 구조가 위기적 상황에 빠진 것은 환경적 변화에 더해 정부의 공적 커뮤니케이션 체계 자체가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2년 전의 그 사건은 종료되지 않고, 현재 진행 형이 되어버렸다. 정보 과잉이 만드는 불확실성의 시대, 공적 커뮤니케이션 체계에 대한 신뢰 회복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 문제를 도외시하고서는 갈라진 기억이 만드는 우리 공동체의 갈등과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2년 전 그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컨센서스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이는 2019년 벽두다.

안민호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 학부 교수

언론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안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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