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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아침을 열며]14년 전 노무현의 호소 또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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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4대 그룹 총수 등 대기업 대표 8명과 중소·벤처기업 대표 8명을 초청해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나온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이후 오랫동안 회자됐다. 재벌에 투항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노 대통령의 진의를 살펴보기 위해 나머지 발언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봤다.

경향신문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가지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또 시장에서의 여러 가지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시장을 어떻게 공정하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동안 정부가 중소기업 정책을 많이 해서 나름대로 기여를 했겠지만 정부 정책만으로는 이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기업 간에 여러 가지 협력들이 잘 이뤄져야 비로소 상생협력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대기업만 세계 일류가 아니라 중소기업도 세계적인 경쟁의 마당에서 당당하게 앞서갔으면 좋겠고, 그래야 우리 경제가 좀 더 튼튼해지지 않을까, 그런 대책이 꼭 있어야겠는데 이 역시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이뤄져야지, 정부의 정책적 간섭을 통해서만은 잘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부로서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최대한 협력하고 지원해 우리 경제가 상생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으면 국민들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도 세계적 기업이 돼야 우리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이는 정부 정책만으로는 안되고 상생협력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표현은 심화되는 대·중소기업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상생협력의 절실함을 호소하는 노 대통령 특유의 직설적 어법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청와대에서 대기업 총수와 중견기업 대표 등 128명의 기업인들과 ‘대화’의 자리를 가졌을 때도 절실한 호소가 느껴졌다. 정부 출범 이후 야심차게 추진한 소득주도성장의 가시적 성과는 보이지 않고, 경제지표는 악화되고 있다. 이에 지지율은 하락하고 ‘친시장(사실상 친기업)’으로 경제정책을 수정하라는 압박이 거세다. 지금 문 대통령에게 경제정책의 눈에 보이는 성과가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기업이 힘차게 도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올해 정부의 목표다. 정부는 기업의 장애가 되는 규제를 혁파하고 기업의 활력을 제고하는 데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다”며 기업인들에게 투자와 고용창출을 호소했다. 실제 올해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은 대기업 등 민간 투자를 활성화해 혁신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거다. 각종 규제가 풀리고 대규모의 연구·개발(R&D) 예산이 지원될 것이다. 정부의 혁신성장에 대한 지원은 현실적으로 대기업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이날 “20조원이 넘는 올해 연구·개발 예산을 통해 기술개발·인력양성·첨단기술의 사업화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며 “수소경제, 미래자동차, 바이오산업, 에너지신사업, 비메모리반도체, 5G 기반 산업, 혁신 부품과 소재장비 등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커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대부분의 사업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등 대기업이 주력으로 밀고 있는 것들이다.

자금력과 기술력, 기술을 생산과 수출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대기업들이 혁신성장의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는 최적의 파트너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대기업의 성과가 많은 협력 중소기업들에 전달되지 않으면 정부가 아무리 돈을 쏟아붓고 지원을 해도 제대로 된 혁신성장은 불가능하다. 최근 조선, 자동차, 철강 등 한국 주력산업의 위기도 상생협력이 안되는 우리 기업 생태계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다. 중국 등이 무섭게 따라오고, 일부 부문은 우리를 넘어서고 있을 때 우리 대기업들은 혁신보다는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가격 경쟁력으로 버텨왔다. 주력산업의 하청업체들은 여전히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 기술 빼가기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호소를 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세계적인 중소기업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을까.

14년 전 노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했던 4대 그룹 총수들(삼성 이건희·현대차 정몽구·LG 구본무·SK 최태원 회장)은 지난주 문 대통령이 주재한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한명(최태원)을 제외하고 모두 바뀌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노 대통령이 그렇게 바랐던 희망은 여전히 멀리 있어 보인다. 상생협력이든 혁신성장이든 시장에 호소하고, 시장의 선의를 바라서만은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그동안의 시간이 증명해 준다.

김준기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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