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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세상읽기]웃기는 사람, 웃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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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수한 대학의 교수가 아내와 딸에게 자랑을 했다. 내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그때마다 학생들이 포복절도를 한다고. 아빠에게 평소 유머감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딸이 이상하다 싶어 말했다. 아닐 거예요, 아빠가 교수라서 웃어 줄 것 같은데. 그 교수가 다음 날 학생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그동안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웃어 준 것 아닌가. 학생들이 기겁을 하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교수님이 하시는 농담은 정말 웃깁니다. 이건 정말이에요. 그 교수가 집에 돌아와 다시 딸에게 말했다. 아니야, 나 정말 웃긴데. 음… 그렇다, 아닌 게 아니라 웃긴다.

남을 웃기는 일은 쉽지 않다. 가수는 한 번 히트곡을 내면 평생 그 노래를 불러도 되니 좋겠다. 코미디언이 웃음의 소재를 개발하는 일은 아주 어렵다고 한다. 더욱이 한 번 쓴 것을 되풀이하기도 어려울 터이다.

경향신문

법무법인에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되어, 사내 생월자 파티를 한다고 하여 가 보았다. 입을 모아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하며 정답게 노래를 불러주고 나서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보니, 누군지 몰라도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계속해서 다소 객쩍은 농담을 하는데 그때마다 좌중이 뒤집어지는 시늉을 하는 거다. 이상하다 싶어 방에 돌아와 알 만한 사람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법인의 창업자 중 한 사람이며 법인 내 실력자라는 것 아닌가. 아차, 눈치 없긴, 나도 좀 웃어 줄 걸 그랬나 싶었다.

우습지 않은데도 웃어 주어야 하는 일이 심각한 것은 그것이 권력관계에서 벌어질 때다. 전임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장관들의 대면보고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하여 배석한 장관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 말은 “그게(대면보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였다. 그 자리에서 장관들이 지어 냈던 어색한 웃음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것은 소통의 부재가 빚은 왜곡된 인간관계다.

소통의 부재가 낳은 웃음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법원에는 ‘벙커’라고 불리는 유형의 인물들이 있다. 본래 골프장의 벙커에 빗대어 나온 말인데, 재판부의 배석판사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부장판사를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들면 배석판사가 써 온 판결문 초안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본다거나 퇴근 후 자꾸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여 배석판사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음치는 우선 자기가 음치인 줄 모르면서 노래 부르기를 즐겨야 음치라고들 하는데, 벙커의 특징 중 하나도 자기가 벙커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어느 유명한 벙커가 높은 자리로 옮기게 되자, 친구가 그에게 “네가 벙커라는 걸 알고 있느냐, 새로 갈 자리에서는 그러지 말라”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그가 과거 함께 근무하였던 배석판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물었다고 한다. 내가 벙커라는데 그게 사실인가. 모두들 펄쩍 뛰며 하는 대답인즉 “아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부장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요”였다.

웃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러 이론이 있다. 웃음의 대상 속에 있는 부조화를 지각하는 것이라는 부조화 이론, 심리적 긴장이 해소되면서 나오는 것이라는 해소 이론, 웃음의 대상에 대한 우월감의 인식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우월성 이론 등이다. 아무려나 웃음은 남이 기대했던 바와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냈을 때 유발된다고 보는 점에서는 입론의 요점이 얼추 비슷하다. 내가 웃기는 줄 알고 있는데 사실은 웃기지 못하는 것, 그런데도 내가 입만 열면 남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고 믿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자기가 한 말이 남을 웃기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것 아닐까. 이것은 상황에 대한 오판 내지 무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누구도 그 상황이 가져오는 위험을 지적해 주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 오판의 주체가 권력자라면, 일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좀 오래된 이야기인데, 5공 시절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우스갯소리 중 하나는 당시의 대통령과 어느 코미디언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라는 것이었다. 같은 점은 두 사람 모두 웃긴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한 사람은 웃기는 줄 알면서 웃기는데 다른 사람은 웃기는 줄 모르면서 웃긴다는 것이었다.

하필 그 전직 대통령의 부인이 얼마 전 자기 남편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분의 남편이 재임 시 늘 짓고 있었던 엄숙한 표정을 생각하면 부인 역시 조크를 던진 것은 아닐 것 같다. 더욱이 그분이 “내 남편은 링컨 대통령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하니, 이번의 발언도 절대로 우스갯소리는 아닐 게다. 그런데 웃음의 본질에 관한 이론 중 하나는, 웃음이란 그것을 유발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느끼는 공격성을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문화적 행위라는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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