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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김편의 오디오파일] 하이엔드 빈티지 스피커 소리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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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알텍 A5 스피커


(서울=뉴스1)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 최근 경기 분당의 모 오디오숍을 방문했다. 최소 한 달에 한번은 들르는 곳이다. 그런데 전에 없던 반가운 스피커들이 보인다. 그 유명한 알텍(Altec)의 A5와 탄노이(Tannoy)의 오토그래프(Autograph)였다. 개인적으로 2,3개월 전부터 갑자기 빈티지 스피커에 관심이 커졌는데, 마침 그 곳에서 빈티지 스피커를 대표하는 2조의 명기들을 만난 것이다.

A5는 1945년 출시된 미국 알텍의 극장용 스피커였다. 지금도 빈티지 애호가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스피커다. 커다란 나무 궤짝(인클로저)에 15인치 우퍼를 집어넣고, 그 인클로저 위에 고역을 책임지는 드라이버와 나팔 모양의 혼을 달았다. 인클로저도 중저역 우퍼의 혼 역할을 하게끔 양 안쪽이 부드러운 곡면을 취하고 있다. 측면에는 '극장의 소리'라는 뜻의 'The Voice of the Theater' 글자가 훈장처럼 붙어있다.

각 구성품 이름은 15인치 우퍼가 515, 인클로저가 110, 중고역 드라이버가 288, 대역 주파수를 나눠주는 네트워크는 N500C이다. A5 자태의 8할 이상을 책임지는 혼은 시기별로 무척 다양한 모델이 장착됐다. 처음 나온 미국 오리지널 A5의 경우 805(8홀), 1005(10홀), 1505(15홀)이 달렸지만, 이후 1975년경 일본에 상륙한 A5에는 311-90(4홀) 혼이 달렸다. 이날 본 것은 혼 앞쪽 구멍(셀)이 10개인 1005 주물 혼이었다.

한편 이날 본 A5는 목재 인클로저 위에 고음 확장을 위한 작은 혼 타입 트위터가 올려져 있었다. 즉 15인치 우퍼가 중저역, 혼을 단 288 드라이버가 고역, 새 혼 트위터가 초고역을 담당하는 3웨이 구성인 것이다. 오리지널 A5는 2웨이 구성이지만 고역 확장을 위해 보통 이렇게 슈퍼 트위터를 많이 단다.

하지만 놀란 것은 소리였다. A5는 사실 저역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스피커다. 15인치 우퍼에 덩치까지 큰 베이스 리플렉스 스피커인데도 저역이 '과감하게' 잘려져 애호가들을 늘 속상케 했다. 필자 역시 A5를 지금까지 몇차례 들어봤지만 이날 들은 소리는 A5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였다. 해상력이 높고, 재생 대역이 넓으며, 소릿결이 부드럽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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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노이 오토그래프 스피커


놀람과 흥분은 탄노이 오토그래프로도 이어졌다. 탄노이는 1926년 설립된 영국의 스피커 제작사로, 1947년 고역 담당 드라이버를 중저역 우퍼 가운데에 집어넣은 동축 유닛 '듀얼 콘센트릭'(Dual Concentric)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개발됐을 때는 후면 캡이 검정색이어서 '모니터 블랙'으로 불렸고, 이후 모니터 실버(1953년), 모니터 레드(1957년), 모니터 골드(1967년)가 나왔다.

오토그래프는 탄노이가 1953년 15인치 모니터 실버 유닛을 장착해 출시한 대형 스피커. 영국 제작 모델의 경우 방 구석에 밀착시킬 수 있도록 후면이 삼각형 모양으로 돼 있다. 오토그래프는 이후 모니터 레드, 모니터 골드를 장착한 모델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이날 본 오토그래프는 모니터 레드(실제로 보면 핑크색에 가깝다), 그 중에서도 앞쪽 고역 드라이버를 가린 더스트 캡이 검정색인 소위 '까만 배꼽' 유닛이다.

이날 들은 오토그래프에서도 전혀 얘기치 못했던 소리가 나왔다. 15인치 우퍼와 내부 백로드혼을 통한 풍윤한 저역은 그대로였지만 그 해상력과 밀도감이 거의 메탈 유닛에 메탈 인클로저를 한 요즘 하이엔드 스피커 수준이었던 것이다. 마치 DSLR 카메라 조리개를 잘 맞춰 흐릿한 피사체가 또렷해진 느낌, 안경점에서 도수를 정확히 잰 안경을 처음 썼을 때의 느낌이었다. 소릿결이 좀더 부드럽고 윤곽선이 매끄러워진 점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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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 레드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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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빈티지 스피커가 이처럼 변신한 것은 네트워크를 손봤기 때문이다. 즉, 각 스피커 유닛에 각자 재생해야 할 주파수를 할당해주는 기판을 새로 장착한 것이다. 이 튜닝의 주인공은 필자가 몇차례 인터뷰를 하기도 한 대한민국 오디오 제작사 올닉(Allnic)의 박강수 대표. 지난해 61단 정임피던스 어테뉴에이터를 개발한 여세를 몰아 빈티지 스피커 네트워크 개조에 나선 것이다. 이는 박 대표가 진공관 앰프 뿐만 아니라 케이블과 스피커까지 제작한 노하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트워크 튜닝으로 스피커 소리 자체가 변하는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치 새 네트워크를 수혈 받은 스피커가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낸다는 인상이었다. 어쨌든 이날 새 네트워크를 탄노이 오토그래프에 장착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네트워크에 61단 어테뉴에이터가 포함된 점이 특징이었다. 2웨이인 오토그래프는 한 네트워크에 한 개, 3웨이로 변신한 A5에는 한 네트워크에 두 개가 투입됐다고 한다.

이쯤에서 반문해본다. 과연 빈티지 스피커에 현대 오디오공학의 손길이 베풀어진 새 네트워크를 다는 일, 그래서 소리 자체를 가히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순수주의자들은 '오리지널리티의 훼손'을 염려할 것이다. 인클로저나 혼 자체도 오리지널을 따지는데 네트워크를 현대 부품, 현대 기술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견 합당하고 명쾌한 논리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일단 유닛, 혼, 인클로저, 네트워크까지 원본 그대로인 오리지널의 가치는 필자도 100% 존중한다. 사실 필자도 돈만 있으면 그런 오리지널 A5와 오토그래프를 갖고 싶다. 하지만 오디오는 골동품이 아니라 계속해서 음악을 들려줘야 하는 책무가 있다. 네트워크에 투입된 커패시터가 수명을 다하면 교체해야 하고, 우퍼 진동판이 찢어지면 수리를 해야 한다. 달리 생각하면 교체와 수리야말로 빈티지의 매력이다.

그러면 이번처럼 단순한 부품이나 배선 교체 혹은 수리가 아니라면? 이는 오디오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취미성이라고 본다. 그냥 폼만 잡기 위한 장식품이나 눈으로만 보는 골동품이 아니라면, 오디오는 늘 자신이 이해하고 만족할 수 있는 소리를 내줘야 한다. 마음에 안 들면 손을 봐줘야 하는 것이지, 그냥 중고장터에 내놓으면 그것은 유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스피커에게 최고의 소리를 안겨주고 싶은 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오리지널에 대한 최고의 사랑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이런 사랑을 이날 두 스피커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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