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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태평로] 담장 안에는 '봄바람', 담장 밖에는 '된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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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권한' 정당하려면 의제 옳고 토의 충분히 해야

반대자들 담쌓고 배제하면 '적폐 대상'들과 다를 바 없어

조선일보

최경운 논설위원


"정책 결정의 최종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다." 10일 청와대 신년 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이다. 대통령제 정부에서 대통령과 각료의 생각이 다르다면 대통령 뜻대로 하는 게 순리다. 미국 대통령들도 "책임은 내가 진다"며 그렇게 하는 경우가 적잖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말이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 사례에 들어맞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대통령의 결정이 정당성을 지니려면 그 의제가 옳아야 한다. 또 결정 전에 찬반(贊反) 의견을 충분히 듣는 게 중요하다. 일례로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이란 '옳은 의제'를 추진하면서도 자기를 비난하는 의원들까지 만나며 끊임없이 반대파를 '설득'했다. 반대 의견에 "내가 간과한 부분"이라며 자신의 안(案)을 수정하기도 했다.

반면 신 전 사무관은 "청와대가 기재부에 민간 기업 사장 인사 개입을 지시하고, 세금이 더 걷혔는데도 거꾸로 국가 부채를 늘리라고 압박했다"고 밝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청와대의 지시는 '부당한 지시'다. 또 신 전 사무관이 밝힌 당시 상황을 보면 찬반 토론은 없고 청와대 압박에 반대 의견을 제대로 개진하지 못하는 실무 공무원의 무력감만 엿보인다.

이 정부가 내부적으로 얼마나 치열하게 소통하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지금껏 외부에 비친 모습을 보면 반대자들과는 열심히 담을 쌓고 있다. 작년 연말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 출신 전·현직 국회의장 4명과 만났을 때가 대표적이다. 청와대 대변인이 "참석 기준은 민주당 원로 선배 정치인들"이라고는 했지만, 야당 출신 전직 국회의장은 단 한 명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청와대가 반대자와 선(線)을 그으면 장관들은 그 선을 넘기 어렵다. 지난 정부에서 경제 부처 장관을 지낸 분의 증언이다. 그는 이 정부 들어 후배 장관의 만찬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반가운 마음에 참모를 통해 장관 측에 전화를 걸었더니 "듣기 좋은 말씀 하시기 어려울 바엔 안 오시는 게…"란 말을 듣고 참석을 포기했다고 했다.

작년 11월 말 국방장관이 전직 장관들과 오찬했을 때도, 전(前) 정권에 몸담았던 3명은 모두 빠졌다. 물론 초청장은 보냈다. 불참한 전 정부 장관들은 "할 말은 많지만 말할 분위기가 아니어서…"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 관계자들은 남북 군사 합의에 비판적인 예비역 장성들이 듣기에 인신 공격성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반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고단한 일이다. 집권자들이 임기 초반 '경청(傾聽)'을 강조하다가 어느 때부터 반대자와 담을 쌓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도 그랬다. 박 전 대통령은 시간이 갈수록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측근들을 삼삼오오 청와대로 불러 식사했고 결국 친박(親朴) 패권 정치의 늪에 빠졌다.

한 정치 원로는 "반대자와 담장을 쌓으면 그 안쪽에선 '우리만 옳다'는 오만이 흐른다"고 했다. 그들에게 담장 밖 반대자들의 외침은 '적의(敵意)'로만 들릴 것이다. 문 대통령이 작년 4월 홍준표 당시 한국당 대표와 단독 회동했을 때 일이다. 홍 대표가 이른바 '적폐 청산' 수사의 편파성을 지적하자, 문 대통령은 "(그러면) 빨리 적폐를 내려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이 정권의 '담장 안 일'에는 어떤가. 현직 청와대 비서관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 수사팀은 작년 11월 중순 기소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검에서 기소 적절성에 대한 검토에 들어간 뒤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담장 안 우리 편에는 '봄바람'이 가득하고, 담장 밖 반대자에겐 '된서리'를 내리는 게 이런 경우 아닌가.

[최경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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