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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제 광고는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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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友야담]

조선일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을지로 골목에 숨은 옛날 다방에서 '점잖은' 2019년 달력을 봤습니다. 흔히 '주류 도매상 달력'이라 쓰고, '헐벗은 달력'이라 읽는. 페미니즘 열풍 때문이건, 교양과 세련의 향상 덕분이건, 반라(半裸) 혹은 전라(全裸) 차림의 여성들은 거기 없더군요. 대신 따뜻하게 차려입은 주인공들이 의젓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탓인지 덕인지 시선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우리 일행은 그 달력 광고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죠.

현혹되지 않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다 문득 뉴욕대 경영대학원 스콧 갤러웨이 교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광고는 정액제를 사용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 내는 세금이 되었다."

주류 도매상 달력에서 유튜브나 넷플릭스로의 비약이 느닷없기는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광고와 인내심의 함수관계 같은. "15초 뒤에 광고를 건너뛸 수 있습니다." 보고 싶은 영상을 무료로 보려면 15초의 광고를 견뎌야 하는 것이죠. 반면 유튜브 레드나 넷플릭스는 자유롭습니다. 한 달 얼마의 정액을 내면 광고에서 해방되니까요. 전에는 무료라 참았던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는 인간의 주의 집중이야말로 가장 희소한 자원이니까요.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지배하는 시대, 우리는 겨우 10분의 집중도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보았던 에마 스톤 주연의 10부작 넷플릭스 SF 드라마 '매니악'에는 이런 설정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도 얼마든지 공짜로 한 끼 밥과 지하철 탑승과 술 한 잔을 얻을 수 있는 세상. 하지만 그는 대가로 애드 버디(ad buddy)를 불러야 하죠. 직역하면 '광고 친구'라고 할까요. 돈은 없어도 되지만 라면 한 그릇을 먹는 동안 내내 옆 자리에 앉은 애드 버디에게 특정 상품 광고를 들어야 합니다. 지하철로 광화문에서 왕십리까지 이동한다면 그 시간 내내 옆 좌석에 광고맨을 앉혀야 하죠. 참으로 무시무시한 대가 아닙니까.

을지로 옛날 다방에서 너무 멀리 와 버렸군요. 다시 한 번 인간의 주의 집중이야말로 가장 희소한 가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스스로 시간의 주인이 되는 한 주일 되시기를.

[어수웅·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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