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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0] 밥을 짓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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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차밥

기다리는 동안에

등꽃을 보네

奈良茶飯[ならちゃめし]出来[でき]るに間[ま]ある藤[ふぢ]の花[はな]

배가 고프다. 밥솥을 열어보니 비어 있다. 밥해야겠네. 밥 짓는 시간은 15분에서 30분 사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배가 고플수록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딱딱한 쌀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찰진 밥으로 변신하는 마법 같은 시간. 귀찮아 라면이나 빵으로 때우려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사람이란 그 사람이 먹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도 그런 말을 남겼다지. 빨리 해치우는 식사는 바람처럼 가벼운 인간을 낳는지도 모른다. 정성을 들이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요 며칠 대충 끼니를 때우다가 면역력이 줄어 호된 감기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건강은 직결한다. 몸이 아프면 일도 못 하니 밥 짓는 시간의 백 배 천 배 손해다. 그렇게 몸으로 지혜를 터득해 정신 차리고 쌀을 씻는다.

예순한 살의 시인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 1874~1959)는 딸과 함께 나라에 들러 그곳 명물 나라 차밥이 다 지어지기를 기다리며 이 하이쿠를 지었다. 나라 차밥은 쌀에 밤, 콩, 팥, 조를 넣고 차를 우린 물로 지은 노릇노릇한 밥이다.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해서 먹는다. 오래전 나라 지역 승려들이 먹던 밥인데 에도시대에 여행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 각지에 퍼졌다. 예부터 영양이 풍부하고 근기가 있어 여행자는 물론이고 가난한 시인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하이쿠의 대가 바쇼도 나라 차밥 석 섬은 먹어야 시의 의미를 안다는 말을 남겼다. 한 섬이 한 끼 분량 한 홉의 천 배이니 나라 차밥 삼천 끼는 먹어야 시의 맛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여러모로 뜻깊은 밥을 기다리는 노시인 교시의 눈에 은은한 보랏빛 등꽃이 들어온다. 구수한 밥 냄새가 풍겨오고 간간이 부는 바람에 탐스러운 등꽃이 한들거리며 늦봄 정취를 더한다. 식사 시간 직전의 가벼운 긴장과 공복이 탐스러운 등꽃 사이를 서성인다.

배가 고프다. 씻은 쌀을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멈추고 찬장을 열어본다. 밤도 없고 콩도 없고 팥도 없다. 전에 엄마가 밥할 때 다시마 몇 조각 넣으면 맛있다고 해서 말린 다시마 한 통을 줬는데 그것도 다 먹었다. 밥에 뭔가 같이 넣어 먹으면 좋겠는데…. 어, 아몬드가 있다. 아몬드 밥? 의외로 고소하니 맛이 좋을지도 모른다. 뽀얀 쌀이 담긴 밥물 속에 우수수 아몬드를 쏟아 넣었다. 버튼을 누르니 세상에서 제일가게 명랑한 기계음이 자기가 맛있게 밥을 짓겠다고 선언한다. 그래, 맛있게 한번 지어봐. 나에겐 요즘 정말이지 근기가 필요하단다. 아몬드 밥을 기다리는 동안에 엊그제 새잎을 틔운 연초록 알로카시아에 물을 주어야겠다.

[정수윤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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