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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에 열광하면서 심청의 환생은 못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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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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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전래동화를 읽고 있는 모습. 옛이야기를 놓고 토론을 벌일 때 난감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옛이야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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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를 놓고 토론을 벌일 때 난감한 부분이 있다. 전반적으로 문학적 감수성과 관련된 것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옛이야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이다.

첫째는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다. 여기에는 현실의 삶과 관련 없는 순전히 허구의 창작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깔렸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력에 의해 펼쳐놓은 것일 뿐이니 우리의 삶에는 전혀 연관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그러한 비현실적 요소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확실히 현대의 독자들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잘 받아들인다. 사실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셋째는 이야기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용을 조작해 퍼뜨리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 부분도 매우 강력하다. 문학 감상이 교훈을 얻기 위한 활동만은 아님에도 옛이야기에서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째, 시대 배경을 토대로 이해하려는 태도다. 조선 시대, 그러니까 유교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생활 질서로 자리 잡혀 있던 시대에 만들어져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식의 수용 태도다.

옛이야기에 비판적 시각이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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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이야기는 주로 비판적 읽기의 자료로 쓰인다.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대강의 줄거리만 배우고 그 내용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기를 시도한다. 토론 활동의 주체는 10대 학생들이다.[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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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용 태도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이야기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흔히들 예능을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이며 너무 진지해지지 말자고 한다. 옛이야기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완전히 실제로 있었던 일로만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도 인간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경험할 수 있는 일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이전 시대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배경을 알았을 때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신화 등의 상징성이 강한 이야기에서 시대 문화적 배경을 찾는 노력은 어쩌면 헛수고에 가까울 수 있다.

특정한 작가가 없는 구비문학으로서의 옛이야기에서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이 상상력을 빌어 형상화한 모습을 확인하고 여기에서 재미를 찾을 일이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비유나 상징을 덮어쓰고 큰소리치는 것이 이야기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교육 현장에서 우리 옛이야기는 해석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이로부터 가치를 찾는 대상이라기보다 비판적 읽기의 자료로 쓰이기에 십상이란 사실이다.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대강의 줄거리만 배우고 나서 그 내용에 대해 비판적으로 읽기를 시도한다. 토론 활동의 주체는 10대 학생들이다.

21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10대 학생에게 아무런 정보 해석 기회를 주지 않은 채 토론용 자료로 제시했을 때 바로 위에서 정리한 것과 같은 이유로 옛이야기는 완전히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으로 가득 찬 것으로 전락한다.

여전히 비정한 효심의 틀에 갇혀 있는 심청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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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심청가'의 한 장면. 우리 옜이야기 중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조사한 결과 '심청전'이 가장 많았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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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우리 옛이야기 중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심청전』이 가장 많다.

생명 경시 풍조를 낳을 수 있고, 딸을 공양미 삼백 석에 넘기는 것은 인신매매와 다름없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불편하다는 것이다. 효심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친 설정을 했다거나, 공양미 삼백 석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곁에서 지켜 드리는 것이 효라는 생각, 좋은 부모라면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을 것 등이 이유가 된다. 너무 과장된 부분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런데 아무도 연꽃으로 환생하는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자 눈빛들이 달라진다. 『심청전』은 심청이 앞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 바다에 빠져 죽고 그냥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물에 빠진 심청은 용왕을 만나고 연꽃에 담긴 채 물 밖으로 내보내졌고, 사람들의 눈에 띄어 임금에게 바쳐졌으며, 황후가 되었고, 거지 잔치를 열어 아버지를 찾았다.

이로써 아버지는 눈을 뜰 수 있게 되었고, 심청은 아버지와 함께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 바다에 빠져 죽은 부분만 그렇게도 열심히 비판해 왔던 것일까. 환생하고 황후가 되고 결국 아버지 눈도 뜨게 했다면 엄청나게 행복한 결말이지 않은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거나 억지라고 믿어 버린다면 또 더는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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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음국악단의 국악뮤지컬 '효녀 심청' 의 공연 모습.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가 바다에 빠져 죽고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에 빠진 심청은 용왕을 만나 연꽃에 담긴 채 물 밖으로 내보내져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되었기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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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야기의 끝까지 가서 전체 맥락을 살폈을 때 심청은 이전의 자기를 버림으로써 다시 태어나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되었기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것은 커다란 삶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만약 심청이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봉양하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면 심청의 아버지는 평생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고, 심청은 삯바느질이나 하면서 살다가, 장 승상댁 부인이 예쁘게 보아준 덕에 그럭저럭 좋은 혼처를 얻어 시집가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심청의 이야기가 아니다. 심청이 아닌 사람을 떠올리며 심청의 이야기를 비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생명 경시니 인신매매니를 떠올리며 심청전을 감상해 왔다면, 혹은 교육 현장에서 그러한 근거를 대며 심청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활동을 하면서 심청을 다루어왔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21세기의 눈으로 옛이야기의 상징을 재단하는 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이야기에 대한 이해력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이다. 요새 극장가에 선보이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천편일률적으로 판타지 세계에 머물러 있다.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지구를 지키는 일은 가능한데 심청이 물에 빠졌다가 환생하는 일은 왜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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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조스 웨던 감독)의 한 장면. 요새 극장가에서 선보이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지구를 지키는 일은 가능한데 심청이 물에 빠졌다가 환생하는 일은 왜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될까.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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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귀함을 발견하게 해 주는 옛이야기의 가치
옛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문제 해결과 인간적 성장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거기엔 삶에 대한 매우 진지하고 싶은 성찰이 담겨 있다. 이야기는 어느 누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퍼뜨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며,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통해 다듬어지고 색깔이 덧입혀지면서 논리 맥락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들은 도태되거나 전승되더라도 소수로, 그것도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굉장히 힘이 센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오랜 세월과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는 동안에도 거의 핵심은 흐트러지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허황한 것은 아닐 것이다. 교훈을 주고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이야기를 했다면 그런 풍부한 상징으로 형상화되는 과정을 수고스럽게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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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하면 떠오르는 대표주자 바리데기도 오로지 효심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크나큰 진실을 담고 있다. 바리데기는 저승길도 마다치 않고 아버지를 살렸기에 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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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하면 떠오르는 대표주자 바리데기도 오로지 효심으로만 이해하기에는 너무 크나큰 진실을 담고 있다. 바리데기는 저승길도 마다치 않고 아버지를 살렸기에 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작정 따르고 실천해야 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효는 이 이야기에 발 들일 자리가 없다. 진짜 부모와의 관계를 깊이 이해한 자만이 저승길로도 나아갈 수 있고, 바리데기는 그것을 해냈기에 망자를 보살피는 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심청이나 바리데기나 ‘자기’라는 틀에 갇혀 있지 않은 채 소명을 깨달은 자로서의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길을 순전하게 갈 수 있었기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었고, 그 힘으로써 그들 부모의 부족함을 해결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지배논리 정도의 속 좁은 범위를 한참 벗어난 일이다.

그래서 옛이야기는 아동용 이야기만은 아니며, 그래서 전래동화라는 말은 더는 통용될 수 없는 말이다. 이 지면에서는 ‘옛이야기’란 표현을 고집스럽게 쓰고 있다. 굳이 학술적 용어를 가져오자면 ‘설화’에 해당한다. 설화에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도 배웠듯이 신화, 전설, 민담 등이 포함된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그리고 무척 고맙게도 『한국구비문학대계』라는 엄청난 자료가 있다.

삼십여 년 전 수많은 선학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채록하고 정리한 자료가 인터넷에도 온전하게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 문자로 입력되어 있기도 하고, 구연 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녹음 파일이 함께 올려져 있다. 이런 훌륭한 자료를 가지고 있음에도 옛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기보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재단하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치를 깎아 먹고 있다. 그 현실이 안타까워 새해 첫 글을 이렇게 시작하였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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