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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0] 말을 버리고 배를 탔다… 대항해시대 앞장선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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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본부였던 토마르의 수도원

조선일보

토마르=송동훈


토마르(Tomar)는 포르투갈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다.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어지는 포르투갈 교통로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과거에는 풍요롭기로도 으뜸이었다. 활기찼다. 지금은 작아져 한적하다. 관광 이외에는 남아 있는 산업도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옛 영광의 흔적은 도시 배후의 산 위에 남아 있다. 멀리서도 그 위용은 당당하다. 성채! 온전하게 남아 있진 않지만 단단해 보인다. 규모도 상당하다. 성벽 안쪽의 정원은 드넓고, 건물은 웅장하다.

그런데 그 건물의 실체가 이채롭다. 성당이며 수도원이다. 성벽 안이라면 응당 영주의 처소(處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까닭은 이곳의 주인이 기사단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기사단은 돈이 많았다. 특히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성전기사단은 가장 부유했다. 그 부의 규모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성당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고, 거대한 수도원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이정표가 있어도 여러 차례 길을 잃을 정도다. 기사들은 왜 토마르까지 왔을까? 왜 이곳에 이처럼 거대한 근거지를 지었을까?

성전기사단의 본부

포르투갈이 십자군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은 지난 '바탈랴' 편에서 얘기한 바 있다. 이베리아 반도를 무슬림으로부터 되찾는 재(再)정복운동,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 과정에서 탄생했다. 레콩키스타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반도에는 유혈이 낭자했다.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1세(Afonso Ⅰ·재위 1139~1185년)는 탁월한 통치자이며 최고의 전사였다. 그의 재임 기간 포르투갈은 타조(Tejo)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리스본과 산타렝(Santar

é

m)을 정복하며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러나 무슬림으로부터 땅을 되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지키는 것은 더 힘들었다.

누가 지킬 것인가? 가장 적합한 주체는 십자군의 산물인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은 수사(修士)와 기사(騎士)가 결합한 하나님의 전사였다.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수사처럼 집단생활을 했다. 교황과 기사단장의 명령에만 복종했고,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것만이 삶의 이유였다. 어떻게 지킬 것인가? 기사가 중세의 가장 강력한 칼이라면, 가장 유용한 방패는 성(城)이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언덕이나 산등성이에 세워진 육중한 성(城)은, 화약이 사용되기 이전엔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통치자들이 아낌없이 방대한 정복지를 기사단들에 나눠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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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에 전 세계의 바다를 누볐던 포르투갈의 범선‘카락’. 당시 모든 포르투갈 범선의 돛에는 그리스도 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십자가가 장식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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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기사단(Templar)은 가장 큰 수혜자였다. 성전기사단은 1차 십자군의 결과로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직후인 1119년에 출범했다. 목표는 예루살렘 수호와 순례자들 보호였다. 유럽의 많은 왕과 귀족들의 대규모 기부를 통해 성전기사단은 막강한 국제 조직으로 성장했다. 유럽 주요 지역과 도시에 지부를 뒀다. 무슬림과 싸우던 이베리아 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폰수 1세의 어머니 테레사 백작 부인은 1128년 섭정의 자격으로 성전기사단을 받아들이고 무슬림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방대한 토지를 기증했다. 포르투갈 영토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성전기사단 본진(本陣)도 남하했다. 1160년 성전기사단은 토마르에 본부를 세웠다. 거대한 교회와 웅장한 성채는 이때 지어졌다.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신분 세탁'

막강한 무력과 막대한 재산으로 기독교 세계 위에 군림하던 성전기사단에도 종말이 찾아왔다. 가진 자의 '교만' 위에 없는 자의 '질시'가 더해진 탓이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Ⅳ·재위 1285~1314년)가 앞장섰다. 프랑스 왕은 성전기사단에 이단의 혐의를 씌웠다. 힘없는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Ⅴ·재위 1305~1314년)는 프랑스 왕의 주장에 맞서지 못했다. 성전기사단은 해체됐고(1312년), 주요 인물들은 불타 죽었다.(1314년) 성전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은 그들의 가장 큰 채무자였던 프랑스 왕이 차지했다.

여파는 전(全) 유럽으로 퍼졌다. 당시 포르투갈 왕이었던 디니스(Dinis·재위1279~1325년)는 성전기사단을 해체하되 그들을 새롭게 창단하는 '그리스도 기사단(The Order of Christ)'에 통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다. 교황은 허락했다.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한 성전기사단은 여전히 막강한 부와 권력을 포르투갈에서 누렸다. 왜 다른 선택을 했을까? 프랑스는 기사단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은 여전히 그들이 필요했다. 동쪽으로부터 포르투갈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해오는 카스티야 때문이었다. 1385년 카스티야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노리고 쳐들어왔을 때 그리스도 기사단은 주앙 1세 편에서 싸웠다.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정복에도 왕실과 동행했다.(1415년) 성전기사단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했다.

대항해시대의 돈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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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1세(Jo

ã

o Ⅰ·재위 1385~1433년)는 유용하고 부유한 그리스도 기사단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했다. 셋째 아들이며 세우타 정복 과정에서 무용(武勇)을 증명한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1394~1460년)를 기사단의 총괄책임자로 임명한 이유다.(1420년) 이제 막 바다 개척을 꿈꾸던 엔히크에게 부유한 그리스도 기사단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 최남단 사그레스에 세운 항해학교에 기사단의 자금을 투자했다. 아무런 수익도 없고, 성공 가능성도 없는 무의미한 사업이란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엔히크가 바다 개척을 꾸준하게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사단의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맹한 기사들도 말을 버렸고, 엔히크의 명(命)에 따라 배를 탔다. 그들은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배의 돛을 기사단의 상징인 사각꼴의 붉은 십자가로 장식했다. 엔히크는 죽는 순간까지 바다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기사단의 모든 것을 자신의 꿈에 투자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기사단은 대항해시대의 첨병이 됐다. 훗날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도,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카브랄(Pedro Cabral)도, 스페인으로 건너가 최초로 세계 일주에 나선 페르난도 마젤란(Fernando Magallanes)도 모두 그리스도 기사단 출신이었다.

기사도 선구자도 가고 성채만 남아

엔히크는 이곳에 기사들의 묘지를 겸한 중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대항해시대에 투신했던 그리스도 기사단 단원들의 무덤이 놓여 있다. 성채로 올라오는 길 입구에 서 있던 엔히크의 동상과 무덤들이 오버랩됐다. 중세를 누비며 무슬림과 싸웠던 기사(騎士)들도 가고, 범선을 타고 바다를 갈랐던 기사들도 갔다.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항해 왕자도 559년 전에 떠났다.

그들의 유적과 유산만 남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유적도 훌륭하지만, 경이로운 건 보이지 않는 유산이다. 기사들의 배는 중세를 가르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엔히크의 바다 개척은 중세의 근간을 흐르는 파괴적인 야망이었다. 여전히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 토마르에서 근대가 잉태됐다. 근대가 성장해 열매 맺은 문명의 토대 위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경이를 뛰어넘는 신비(神祕). 그것이 역사다.

[기이할 정도로 화려한 창문 '마누엘 양식']

성전기사단의 후예인 그리스도기사단은 강력하고 부유했다. 항해왕자 엔히크 이후 포르투갈의 왕들이 기사단에 대한 통제의 끈을 놓지 않은 이유다. 포르투갈 전성기에 군림했던 마누엘 1세(Manuel Ⅰ·재위 1495~1521년)도 마찬가지로 직접 기사단장을 맡았다. 그는 대항해시대의 첨병인 그리스도기사단 본부인 토마르 수도원 교회의 일부를 '마누엘 양식'으로 다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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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를 이끌던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마누엘 양식의 창문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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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양식은 포르투갈 특유의 후기(後期) 고딕 양식으로 대항해시대를 상징한다. 대표적인 것이 수도원 교회 서쪽 벽의 창문 장식이다. 기이할 정도로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기사단의 상징인 십자가, 마누엘의 개인 문장(紋章)인 혼천의, 항해를 상징하는 밧줄과 매듭 등으로 구성돼 있다.

[토마르=송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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