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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9] 기도가 만든 기적… 神은 서자의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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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을 제국으로 키운 왕조의 성지 ‘바탈랴 수도원’

조선일보

1426년 10월 4일 리스본 근교의 신트라(Sintra) 왕궁. ‘대왕’으로 불리는 포르투갈의 주앙 1세(João Ⅰ·재위 1385~1433)가 자신의 유언장에 서명했다. 중세 유럽 왕들의 유언장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주앙 1세가 유언장에서 한 수도원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수도원의 설립 배경, 도미니크 수도회에 운영을 맡긴 경과, 수도원에 속한 수사들의 처우에 대한 문제까지. 왕이 이례적으로 관심을 보인 수도원의 이름은 바탈랴(Batalha). 포르투갈어로 ‘전투’를 뜻한다.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120㎞쯤 떨어져 있다. 주앙 1세가 세운 아비스(Avis) 왕조는 1385년 이 지역에서 벌어졌던 ‘바탈랴’를 통해 탄생했다. 수도원은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서 지어졌다. 결국 바탈랴 수도원은 주앙 1세의 정통성을, 그가 휘두르는 왕권(王權)의 신성함을 세상에 알리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지만 바탈랴 수도원의 규모는 압도적이다. 리스본의 세계적 명소인 제로니무스(Jerónimos) 수도원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은 복합 종교 시설이다. 하나의 교회와 두 개의 중정, 왕실 무덤과 미완성된 대예배당이 하나의 수도원 안에 옹기종기 몰려 있다. 모든 건물의 외관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내부에는 경건함과 사치스러움이 공존한다. 수도원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건물 곳곳에 주앙 1세와 왕비 랭커스터의 필리파(Filipa·1360~1415), 그리고 아비스 왕조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정문과 남문 위에 새겨진 문장이 대표적이다. 교회를 지나면 왕실 중정(Royal Cloister)으로 나가게 된다. 처음에는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50m에 달하는 규모에, 다음으로는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에 놀라게 된다. 장식은 포르투갈 제국의 전성기를 누렸던 마누엘 1세(Manuel Ⅰ 재위 1495~ 1521)가 덧붙인 것이다. 자신의 위대한 선조를 기리기 위한 후속 작업이었지만, 마누엘 1세는 자신의 개인 문장인 혼천의(渾天儀)와 그리스도 기사단의 십자가도 빼놓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전투였기에 이런 수도원을 건립했던 것일까? 이야기는 포르투갈의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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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수도원의 왕실 중정 위로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한 이 수도원은 장차 포르투갈을 세계 제국으로 만들 아비스 왕조의 탄생을 기려 세워졌다.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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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1세와 후안 1세의 전쟁

포르투갈은 십자군이 세운 나라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은 하나님의 적(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던 신의 전사(戰士)였다. 멀리 지중해 건너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무슬림이 지배하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도 그들에겐 중요한 전쟁터였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불린 이베리안 반도의 재(再)정복 운동의 선두에는 그래서 언제나 십자군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중 두각을 나타냈던 이가 '부르고뉴의 엔히크(Henrique 1066~1112)'였다. 오늘날 유명한 와인 산지인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인 엔히크는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레콩키스타에 참전했다. 능력까지 출중했던 엔히크는 카스티야왕의 사위가 되고, 결국 아들 대(代)에 이르러 포르투갈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1139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역사의 숙명이다. 부르고뉴 왕조의 끝은 페르난도 1세(Fernando Ⅰ·재위 1367~83)가 어린 딸만 남기고 사망하며 찾아왔다.(1383년) 왕위는 어린 딸의 남편인 카스티야의 후안 1세(Juan Ⅰ·재위 1379~1390)에게 넘어갈 처지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런 상황을 거부했다.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해 250년 가까이 키우고 지켜온 나라를 단지 왕의 사위라는 이유 때문에 다시 카스티야 왕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국회에 해당하는 대의기관)가 소집됐다. 코르테스는 페르난도 1세의 서제(庶弟)인 주앙을 국왕으로 선출했다. 장차 '대왕(大王)'으로 불릴 주앙 1세가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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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수도원의 위풍당당한 외관. 앞의 기마 동상 주인공은 알주바로타 전투(1385년)를 승리로 이끈 포르투갈 총사령관 페레이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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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공을 성모 마리아에게 돌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다. 카스티야의 왕이 이 간단한 이치를 모를 리 없다. 코르테스의 선택 따위로 포르투갈 왕좌를 향한 카스티야왕의 야망을 멈출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수많은 귀족이 존재하지 않는가? 카스티야의 대군이 리스본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주앙 1세 역시 그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일급 정치가였다. 그는 코르테스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잉글랜드로 사신(使臣)을 보내 원군을 청했다. 잉글랜드는 숫자는 적었지만 강력한 궁수부대를 보내줬다. 주앙 1세는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이며 탁월한 전략가인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Nuno Álvares Pereira·1360~1431)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훗날 성인(聖人)에 오르는 포르투갈의 국민 영웅 중 한 사람이 바로 페레이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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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은 리스본에서 적을 기다리지 말고 나아가 싸우자고 조언했다. 왕은 받아들였다. 그의 군대는 카스티야 군의 길목을 차단하고 진을 쳤다. 알주바로타(Aljubarrota). 군의 사기는 높았다. 그러나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포르투갈 군은 대략 6500명에 불과했다. 카스티야 군은 3만 명을 넘어섰다. 사기만으로 꺾을 규모가 아니었다. 전투 전날, 주앙 1세는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했다. 기적을 내려달라고. 다음 날 오랜 강행군 끝에 카스티야 군이 전장(戰場)에 도착했다(1385년 8월 14일).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단박에 적군의 위치가 유리함을, 아군이 지쳐 있음을 간파했다. 후안 1세는 전투를 다음 날로 미루라고 명령을 내렸다. 현명한 명령이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 승리를 자신했던 성급한 기사(騎士)들이 왕명을 무시하고 돌격했던 것이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다가오는 적의 기사들을 향해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카스티야군이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물러서기까지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 짧은 시간에 포르투갈의 주인(主人)이 결정됐다. 주앙 1세의 왕위는 확고해졌고, 카스티야 후안 1세의 꿈은 사라졌다. 승리의 원인은 신속한 전진, 유리한 입지 선점, 궁수부대의 적절한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카스티야 기사들의 무모함에 있었지만 주앙 1세는 공(功)을 성모 마리아에게 돌렸다.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포르투갈 역사에 남을 거대한 수도원을 지어 바쳤다. 그래서 바탈랴의 정식 이름은 '승리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다.

미완성이 주는 울림

주앙 1세는 왕권의 상징인 바탈랴 수도원을 또한 왕가(王家)의 성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거대한 예배당을 수도원 안에 만들었다. '설립자의 예배당'이다.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한가운데 주앙 1세 부부의 관이, 주변으로는 아들·며느리들 관이 배치돼 있다. 주앙 1세 관 앞에는 청동 월계관이 놓여 있다. 인상적이다. 예배당 안에는 청동 월계관이 놓인 관이 하나 더 있다. 대항해시대의 선구자인 항해 왕자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1394~1460)의 관이다. 그는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다. 이 두 부자는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바탈랴 수도원의 또 다른 백미는 '미완성 예배당'이다. 주(主)교회 뒤편에 있다. 주앙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두아르테(Duarte·재위 1433~1438)가 짓기 시작했으나 후대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짓다 만 건물만으로도 충분히 웅장하고 화려하다. 완성됐다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충분히 좋다. 미완성이 주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깊은 쓸쓸함이 남기는 여운을 어디에서 또 느낄까? 주앙 1세의 후손들은 위대한 해양 제국을 건설하지만 그 수명은 짧았고 성공은 미완에 그쳤다. 마치 이 미완성 예배당처럼. 그런 의미에서 바탈랴는 포르투갈의 위대한 역사인 동시에 다가올 역사에 대한 예언이다.

리더의 자질은 주제 파악 작은 나라의 왕 주앙 1세, 결혼으로 잉글랜드와 동맹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주제 파악'이다. 주앙 1세는 그런 점에서 탁월했다.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카스티야를 물리치고 왕위를 지켰지만 그는 포르투갈의 한계를 명확히 알았다. 혼자 힘으로는 카스티야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카스티야와 싸우려면 동맹국이 필요했고, 잉글랜드는 전략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최상의 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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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수도원에 있는 주앙 1세(위)와 잉글랜드 출신의 필리파 왕비의 석관. 두 사람은 포르투갈-잉글랜드 동맹의 상징으로 죽어서도 함께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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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1세는 잉글랜드의 왕자이자 권력자인 랭커스터 공작의 딸 필리파와 결혼했다(1387년). 필리파의 소중함은 사후(死後)의 무덤에서도 읽힌다. 바탈랴 수도원의 설립자 예배당에 둘은 나란히 묻혔고, 석관 위에 놓인 두 사람의 조각은 서로의 오른손을 꼭 잡고 있다. 마치 양국의 영원한 동맹을 상징하듯이. 그리고 주앙 1세의 계획대로 양국은 수백 년 동안 동맹으로 기능했다.

[바탈랴=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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