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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먼저 견뎌낸 '언니'의 혐오 사회 돌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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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뷰

이런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페미니스트는 원래 화나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 걸까?', '세상은 너무 빻았고, 동료는 적고, 너무 지친다'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 '여자로 태어나면 누구나 한번 이상 성폭력 피해자가 되는 한국 사회에서, 먼저 그런 일을 겪은 언니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러니까, '먼저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고 궁금해 해본 적 있는 사람.

이 책은 두 가지의 포인트를 잡고 읽으면 좋다. 하나는 성폭력 사건으로 가해자를 법적 처벌하자고 마음먹게 된 여성이 스텝 바이 스텝 어떻게 요령 있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부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먼저 산 '언니'들이 이런 여혐사회에서 피해를 입고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작가는 일찌감치 '꽃뱀몰이'를 당해본 여성이다. 작가의 꿈을 갖고 직장에 다니다가, 사내 연쇄 성폭력 문제에 휩쓸려서 졸지에 총대를 메고 법정 싸움에 나섰다. 가해자는 나 혼자에게만 가해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같은 직장의 다른 여성들도 줄줄이 피해자였다. 처음에는 가해자를 이해하려고도 해 봤다. 문제를 똑바로 인지하고 나서는 대학에서 배운 여성주의 지식대로 법적인 조언을 받고 피해자끼리도 지지하며, 주변의 가능한 도움을 청하며 잘 처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사건은 마음먹은 대로 척척 풀리지 않았다. 가해자는 발뺌하고, 피해자 주변의 남성들조차 가해자의 편을 든다. 사건의 진행 과정, 예를 들면 서부지방법원 가는 길과 법원 가는 날 화장실에서의 기억, 사건 진행 중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사건이 종료된 후의 허무함과 고립감까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생생하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먼저 겪은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한 이라면, 이 책을 참고할 만하다.

이 책의 리뷰를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여러 이유가 있다. 평소에 넘치는 유머감각으로 삶의 문제들을 가뿐하게 해치워나가는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이고, 특히 오롯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여자의 자존감 자장을 모두가 멋대로 침범하고 찌그러뜨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회에서 그 예의 없는 인간들을 '우아하게' 처치하는 태도가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서, 삶의 아픔과 무례들을 정면으로 맞서보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문장들을 쓰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 사람 주변에 동그란 원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원은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는 존엄과 자존감 등에 영향을 주는 반경이라고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원은 좀처럼 함부로 침범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번듯한 체격과 외모를 가진 이성애자 비장애인 전문직 고학력자 남성이라면? 타인의 시각에서 그 사람이 사회의 다수자(majorities)에 속한다는 것을 외부에서 쉽게 읽을 수록, 그 사람의 배경이 '빵빵'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코드가 많을수록 그 원은 반듯하고 온전한 동그라미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minorities)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대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 원의 경계를 시도 때도 없이, 허락도 없이 불쑥 침범한다는 뜻이다.

지나가는 남자가 번호를 달라고 쫓아온다. 거절했더니 욕을 하면서 간다. 일할 때 똑같은 의견을 말했는데, 내가 말할 때는 무시당하고 남직원이 말할 때는 쉽게 받아들여진다.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길에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 앞까지 따라 왔다가 집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겨우 돌아간다. 남자친구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친구는 친구들이랑 내 얼굴과 가슴 사이즈를 품평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모두 내가 겪고, 내 주변의 여성들이 겪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내 주변의 원은 잔뜩 찌그러진다. 나를 보호해주는 알맞은 만큼의 쿠션이 없다보니 성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자존감이 쪼그라들고,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 순 없다! 이것을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딱 내가 받은 만큼 정확히 돌려주고, 문제가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사태를 종료시키는 법을 배우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내게 가해지는 무례함을 그저 참지 말되, 그 무례함의 총량을 제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상대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적시에 적절히 돌려주면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했음을 깨닫고 머쓱하게 돌아서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상황이 내게 더 위험하게 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먼저 산 언니들도 다 이런 삶의 자세를 고민하고, 배우고, 실천하면서 살았구나!' 하고.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작가가 어떻게 '받은 만큼 정확히 돌려주기'를 실천하면서 살아 왔는가를 보여준다.

왜, 꼭 있다. 동네에서 젊은 여자들에게 시비 거는 '아재'나 '할배'들 말이다. 나만 해도 일정한 직장이 없고 집에서 글을 쓰거나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수업 같은 것을 해서 먹고 사는 젊은 여자이다 보니, 동네의 한 50대 아저씨는 점심 무렵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젊은 애가 집에서 논다, (수업하러 간다고 대답하면) 팔자 좋게 배우러 다닌다, (제가 진행하는 수업이라고 대답하면) 가방끈 길어 편한 일 해서 좋겠다는 둥 빈정거려서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이러다 어느 날 내게도 이 책의 저자처럼 '이년 저년' 하고 '얼굴이 X같이 생겼다'고 시비 거는 할배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할배 무리와 시비가 붙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동네 주민끼리 이러지 말고 참으라"고, "(욕한 할배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니니 오해 말라"고 말하자 작가는 이렇게 대응했다.

"참아요? 제가 왜 참아야 하죠? 저는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인권을 가진 존재인데, 제가 왜 모욕받고도 참아야 하죠? 아 글쎄, 여러분. 이 할배들이 저에게 이년 저년 하고 얼굴이 X같이 생겼다네요."

"오해 말라고요? 제가 무슨 오해를 했죠? 지나가는 사람에게 욕했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인데 제가 뭘 오해했죠? 저도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인권을 가진 존재인데, 제가 모욕감을 느낀 게 왜 오해죠? 아 글쎄, 여러분. 이 할배들이 저에게 이년 저년 하고 얼굴이 X같이 생겼다네요."

작가는 대략 이런 레퍼토리의 말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길거리에서 한 시간 동안 반복한다. 사실 이것은 무수한 갈등을 온몸으로 겪으며 요령을 익혀온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이다. '내 주위의 원을 무례한 사람이 찌그러뜨리는' 상황을 마주하며 작가는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할배들과의 갈등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나는데, 우선 첫 번째 갈등에서는 '경찰을 부르고, 이 상황을 모욕죄로 처벌할 수 있나?' '모욕죄의 성립요건은 어떤 것인가?' 물어보고 따져본다. 동네에서 고분고분한 여자가 아니라고 찍히고 나서 2차전이 발생한 후, 이것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빠르게 판단한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다고도 판단 내린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똑같이 상스러운 말을 하지도 않고, 언어적 마찰을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시키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입장과 상대의 잘못을 설명하는 말을 반복하며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관객을 불러 모은다. 관객이 인물들을 보고 잘잘못을 판단하게 한다. 할머니가 "젊은 여자에게 왜 시비 걸고 다니냐"며 할배의 등짝을 대신 때려주는 장면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이렇게 우아하게 대처한 상황을 적어 내려간 후 마지막 대사가 멋지다.

"흠, 이 정도 망신을 주었으니 다시는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시비 걸지 않으려나?"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온 '언니'들에게 빚졌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반드시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작가의 북토크에 참여한 후 그의 가방에서 꺼낸 1987년판 동녘의 <암탉이 울면: 새벽을 여는 여성을 위하여>를 목격했을 때다. 장표제지에 적힌 또박또박한 서명을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면서, 그간 한 명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여성주의자가, 글 쓰는 여자가 지내온 내 나이만큼의 세월을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의 생이 처음이라, 각자의 문제를 처음으로 겪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라는 걸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용기를 얻고 문제를 더 잘 헤쳐나갈 수가 있다. 지치지 않고, 또박또박, 각자의 자리에서.

프레시안

▲ 제가 왜 참아야 하죠?(박신영 지음) ⓒ바틀비


기자 : 홍혜은 페미니스트 저술가·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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