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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인기 사진작가 이명호 인터뷰 "텅빈 캔버스?…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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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캔버스에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아주 희미한 색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액자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시간에 쫓겨 살다보니 주름살이 더 늘었구나,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 무렵에 사진작가 이명호(43·사진)는 "많은 관람객들이 거울을 보는 것 같다고 하더라. 작품에 투영된 자기를 응시하다가 치유와 위로를 얻고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거의 백지 상태여도 화려한 이미지 작품만큼 파장이 크다. 그래서 서울 갤러리현대 개인전 주제가 'Nothing, But(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모든 것을 비운 채 전업 작가로 다시 시작하는 그의 마음을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교수 연구실을 정리한 후 휴대폰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순간 '저장 공간이 찼습니다'는 메시지가 뜨더군요. 무슨 운명의 계시처럼. 전임 교수로 일하니까 작업에 집중이 안 돼 더 늦기 전에 내려놓기로 했죠."

백지처럼 보이는 작품 '9 Minutes' Layers(9분의 층위)'는 서해안 식물 영초(靈草)를 9분 동안 찍은 사진 10개를 합친 결과물이다. 빛의 삼원색을 모두 섞으면 흰색이 나오듯, 이미지를 쌓으면 '무(無)'가 된다고.

"빛을 채집하면 모든 게 사라져요. 긴 시간 필름을 노출해 빛을 촬영한 사진을 겹겹이 올리면 하얀색만 남아요. 9분이란 시간의 압축이자 빛의 본질이죠. 인간의 욕심과 허무에 대한 고찰로도 이어지고요."

원래 그는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설치해 찍은 '나무(Tree)' 연작으로 '나무 작가'로 불렸다. 사람이 자연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그리는 것 같은 작품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에는 나무 앞에 캔버스를 설치한 'Nothing, But' 연작을 발표했다. 부산 다대포와 서해안 갯벌 등에 캔버스 구조물을 세워놓고 밀물과 썰물의 흔적까지 포착했다.

작가는 "텅 빈 캔버스는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철학적인 사진작가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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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Bu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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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Tree' 연작도 이번 전시장에 펼쳐진다. 제주도 오름과 억새밭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세워 서정적인 풍경을 완성했다. 마음에 와 닿은 나무를 만나고 1년여 동안 관찰한 후 포착했다고. 마치 캔버스 위에 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회화처럼 느껴진다. 사막 한가운데 기다란 캔버스를 보일 듯 말 듯 설치한 'Mirage(신기루)' 연작도 대표작이다. 몽골 고비 사막,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 러시아 툰트라 초원 등에서 주변 학생 수백 명을 동원해 캔버스를 펼친 후 촬영했다. 불모의 땅 저 너머에 생명의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 혹은 오아시스가 존재하는 듯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고달픈 현실의 시공간을 희망의 순간으로 뒤바꾼 것 같다.

올해 여름 프랑스 생테밀리옹에 위치한 샤토 라호크 와이너리와 협업한 작품과 과정을 담은 영상도 공개했다. 와인 50ℓ를 부어서 붉게 염색한 캔버스를 와이너리에 놓고 찍었다. 이 사진은 2016년 빈티지 와인 라벨로 사용됐다.

갤러리현대와 뉴욕 요시밀로갤러리 전속 작가인 그의 작품은 역사적 사진 컬렉션으로 유명한 프랑스국립도서관, 장폴게티미술관, 암스테르담사진미술관, 국립빅토리아갤러리 등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6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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