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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이굴기의 꽃산 꽃글]바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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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인왕산 기슭에서 10여년을 ‘삐댄’ 적이 있다. 그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서 자주 인왕산을 들락날락거렸다. 어느 날 ‘인왕제색도’를 그린 겸재의 집터가 사무실에서 코앞 거리의 군인아파트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 매일 그 집터에 서서 인왕산의 변화를 관찰하고 사진으로 찍었다. 인왕산은 계절을 간격으로 하여 변하되 인왕이 거느린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였다. 간단없이 출몰하는 구름처럼 그때그때 찾아온 단상을 메모하였다가 책으로 꾸몄다. 감히 빛으로 그린 ‘신인왕제색도’란 제목을 붙였다. 인왕의 슬하를 떠나 파주 심학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끔 서울에 나가 인왕산을 만나면 뭉클, 눈에서 물이 삐어져 나온다. 겸재 정선에 대해서도 흠모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겸재가 현령을 지냈던 서울 양천에 위치한 겸재정선미술관을 가보는 날이 드디어 왔다. 그곳에서는 공기부터 달랐다. 눈앞의 풍경은 물론 마음속에 자리한 관념의 경치까지도 그려낸 산수화를 보다가 그것들과는 사뭇 다른 그림을 만났다. 화훼초충화의 하나인 ‘서과투서(西瓜偸鼠)’였다. 이미 많은 쥐들이 들락날락거린 듯 큼지막한 수박의 밑동은 구멍이 크고, 여기저기 붉은 씨를 퉤퉤 뱉으며 정신없이 갉아먹는 쥐를 그린 그림이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겸재의 섬세한 관찰력에 기대어 몇 가지 식물을 찾아보았다. 보라색 꽃은 달개비(닭의장풀)인 것 같다. 우아하게 줄기를 뻗는 건 바랭이인 것 같고, 아마도 그령으로 짐작되는 벼과의 식물도 의젓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식물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골에서 본 풀을 뒤늦게 알게 되어 퍽 좋다. 저곳에 저것이 없었다면 그곳은 빈 구멍이었다. 그것을 보아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면 그곳은 빈자리였다. 잡초라는 말을 치우고 고유명사를 부르는 기쁨이 크다. 언젠가 인왕산 아래 수성동계곡의 맨 마지막 집에서 만났던 달개비, 나도 참 좋아하는 여름 과일인 수박. 그리고 고향에서 발길에 차이던 꺼끌꺼끌한 그령과 바랭이. 260여년의 시차를 두고 겸재의 예리한 시선에 내 둔탁한 그것을 흐뭇하게 포개는 이 즐거움! 바랭이, 벼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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