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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비단벌레 수천마리, 영롱한 작품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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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의 증손자 얀 파브르

죽은 비단벌레의 빛이 거의 영원을 향하고 있다. 벨기에 화가 얀 파브르(60)의 회화 '왕의 축제가 끝나고'는 딱정벌레의 일종인 비단벌레 5000여 마리의 날개를 붙여 개, 뼈다귀, 파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금과 에메랄드·호박 등 보석의 다색을 터뜨리는 곤충의 껍질이 삶과 죽음, 허무하지만 영속적인 그 순환의 연쇄를 묘사하고 있다. "저 빛을 보라, 그리고 모양을. 생사를 잇는 다리 같지 않나?" 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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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마리 비단벌레 날개를 붙여 만든 대형 회화 '충성은 죽음을 사랑한다I·II'(2016) 앞의 얀 파브르. 그는 "증조할아버지가 '파브르 곤충기' 등에서 보여준 곤충 드로잉과 유려한 글이 내 미학에 큰 영향을 줬다"고말했다. /김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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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파브르 곤충기'를 쓴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1823~1915)의 증손자다. "열여섯 살 때였다. 혼자 모기나 개미 따위를 잡아다 팔·다리를 뜯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며 놀았다. 그걸 본 삼촌이 책 한 권을 건넸다. '파브르 곤충기'였다. 증조할아버지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됐다." 이후 곤충은 그의 예술관 내부에서 미적으로 부화했고, 2008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성장했다. "나는 곤충이 사람보다 더 뛰어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통섭의 행동가다. 소똥구리가 주변의 환경을 뭉쳐 굴리며 나아가듯이."

내년 2월까지 부산 갤러리604에서 개인전 'Loyalty and Vanity'(충성과 허무)를 연다. 대표작인 비단벌레 연작 3점은 2016년 러시아 에르미타주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이다. 대형작 '충성은 죽음을 사랑한다I·II'는 개와 해골(인간)이 서로를 탐하는 다소 과격한 에로티시즘을 비단벌레 수천 마리로 재현했다. "비단벌레를 식용하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레스토랑에서 주로 재료를 구해 조수들과 반년간 핀셋을 들고 씨름한다. 미술로서의 비단벌레는 역사가 유구하다. 한국에서도, 수천년 전 여러 고대 국가에서도 비단벌레 무덤 장식이 발견된다. 죽음이 삶의 끝장이 아니라는 믿음의 실현을 위해서다." 개막식이 열린 지난 14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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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시간의 중력'(1989). 오른쪽 사진은 '해골과 흰얼굴소쩍새'(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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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 '나뭇잎벌레' 연작 3점도 국내 처음 공개된다. 볼펜 드로잉 한가운데 나뭇잎벌레를 붙인 콜라주 작품이다. "종이 위에 나뭇잎벌레 여러 마리를 올려놓고 그들이 움직이는 궤적을 실시간으로 따라 그렸다. 이건 곤충의 퍼포먼스다. 그림 가운데 진짜 나뭇잎벌레와 종이로 만든 나뭇잎벌레를 마치 환영처럼 대칭으로 붙여놨다. 제목은 '푸른 시간(Hour Blue)' 시리즈인데 '푸른 시간'은 번데기와 부화 사이 마법 같은 찰나를 일컫는다. 삶(움직임)과 죽음(멈춤)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드로잉은 200원짜리 빅(bic) 볼펜으로 한 것이다. "가난한 무명 화가였을 때 빅 볼펜은 가장 값싼 재료였다. 특히 파란색 잉크는 빛의 각도에 따라 비단벌레처럼 여러 색으로 반짝인다." 그에 따르면 볼펜회사 빅 창립자도 그의 그림을 소유한 바 있다.

곤충뿐 아니라 짐승의 뼈도 그의 주 재료다. '해골' 조각 연작 10점은 유리로 만든 인간의 해골 두상이 새·고양이 등의 실제 뼈를 물고 있는 형상이고, 설치작 '카타콤베의 죽은 들개들'은 생일 고깔을 씌운 개뼈를 매달고 천장에 색유리를 달아 연회장처럼 연출한 것이다. "고속도로 등에서 로드킬 당한 짐승을 주워 뼈를 추린다. 내게 뼈는 사망이나 완료의 상태가 아니다.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유동의 개념이다." 충격적인 이미지 탓에 동물애호가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시위대들이 전시장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했다. 작품 콘셉트와 과정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모든 극단적인 과격성은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저술가이자 연출가이며 디자이너인 그는 예술의 전방위적 연결을 제시한다. 2006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눈물의 역사' 안무가로 방한한 적도 있다. "춤을 출 때 인간의 움직임이 곧 그림이다. 그것은 모두 이어져 있다."



[부산=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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