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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 (화)

[위험을 떠맡은 사람들](2) 교육도, 예방도, 사고책임에 손해부담도 모두 하청업체에...태안화력 용역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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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고 김용균씨의 유품. 공공운수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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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씨(24) 사건의 배경에는 원청이 현장에서 전권을 휘두르면서도 그에 따른 책임은 회피할 수 있는 고질적인 원하청 관계가 있었다. 위험한 업무는 하청업체에 책임을 떠넘기고, 비용을 줄이려 1인 근무를 시키는 등 안전관리에 소홀한 탓에 끔찍한 사망사고들이 반복되고 있다.

16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한국서부발전과 한국발전기술·한전산업개발의 용역계약서를 살펴보면 태안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서부발전은 발전소 상·하탄설비의 운전을 한국발전기술 등 3개 하청업체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다. 배에서 내린 석탄을 ‘저탄장’으로 옮겨 저장하고, 발전기까지 옮기고, 떨어진 석탄을 청소하고, 발전이 끝난 뒤 남은 황과 재를 처리하는 발전 전후 과정이 모두 하청업체에게 맡겨진 업무 범위다. 그 외에 발전소 시설을 정비하는 업무도 외부에 맡겨져 있다. 숨진 김씨는 한국발전기술에 소속돼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에서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벨트를 관리하고, 문제가 생기면 처리하는 일을 했다.

■“낙탄처리는 하청에 재하청”

발전소 현장 근무자들은 “발전소 일 중 가장 위험한 게 하청업체에 맡겨진 일들”이라고 입을 모았다. ㄱ씨는 발전이 끝나고 남은 황이 외부에 나가지 못하도록 처리하는 ‘탈황설비’를 다루는 한전산업개발 소속이다. ㄱ씨는 “화력발전 후 타고 남은 재도 컨베이어벨트로 운송되기 때문에 전동기 회전체를 점검하고 설비를 운전하면서 똑같은 위험을 겪는다”며 “고형물이 운반되는 철제 통로 속에 들어가 삽으로 찌꺼기를 파내는 것처럼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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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 석탄운송설비타워 내 컨베이어벨트와 시설들이 지난 13일 멈춰 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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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 동안 국내 5대 발전기업에서 벌어진 산업재해는 모두 346건인데, 이 중 337건이 하청노동자가 당한 사고다. 하청업체들이 용역 재입찰 때 불이익을 당할까 봐 산재를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아, 실제 사고는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청업체가 위험 업무 중 일부를 떼어내 2차 하청업체에 재하청을 주기도 한다. 김씨가 일했던 한국발전기술은 운송 도중 기계에서 떨어지는 석탄을 청소하는 ‘낙탄 처리’ 업무의 일부를 다른 업체에 위탁했다. ‘하청의 하청’인 셈이다.

재하청업체 직원들은 야간근무를 하지 않는 대신 상여금이 없어 업체로서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 한국발전기술 직원 ㄴ씨는 “현장에서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 중 하나가 낙탄 처리”라고 말했다. 낙탄을 제때 치우지 않으면 기계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어 수시로 치워야 하는데,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 몸을 숙이거나 기계 안에 몸을 반쯤 넣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죽은 김씨도 낙탄을 치우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임도, 부담도, 하청업체에

한국서부발전과 한전산업개발의 용역계약서에는 교육훈련과 인명·설비안전 책임이 모두 하청업체에 있는 것으로 돼 있다. 현장 안전관리인도 하청업체가 선임해야 하고,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교육과 위험요소 제거, 사고 예방조치도 모두 하청업체 몫으로 명시돼 있다. 용역계약서는 이처럼 권한은 원청에만 집중되고 책임은 하청에만 쏠리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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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노조 관계자 등이 사고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기계 안을 들여다보며 컨베이어벨트가 잘 굴러가는지 확인하고 이상이 있으면 조치하는 게 김씨의 업무였다. 공공운수노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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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업체는 업무를 정해진 기간 안에 끝내지 못하면 배상금을 내야 하고, 발전소 출력이 줄어들거나 발전이 멈추면 시간에 비례한 벌과금을 낼 의무도 있다. 원청은 ‘계약 목적상 필요한 경우’에 추가업무나 특별업무를 하청업체에 지시할 수도 있고, 용역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 한국발전기술과의 용역계약서도 대동소이하다. 이 계약서에는 하청업체가 ‘계약의 수행에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가진 근로자’를 채용해야 하고, 직원들의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돼 있다.

계약 기간에 손해가 발생하면 하청업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조항도 있다. ‘하청업체의 책임이 없는 경우에는 원청이 부담한다’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책임이 없다’는 걸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원청은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직원을 골라 교체하라고 요구할 권리까지 있다. 하청업체는 이런 요구를 받으면 해당 직원을 즉시 교체해야 하고 원청 승인 없이는 다시 발전소에 투입시킬 수도 없다.

■‘숙련’될 시간이 없다

산업현장에서 참사가 되풀이되는 원인을 ‘안전불감증’ 탓으로 돌리지 말고, 위험을 외주화하고 현장 안전관리와 교육 책임을 하청업체에 모조리 떠넘기는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하청업체에서 사망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발전업계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노동자 4명이 숨진 지난 3월 부산 해운대 포스코건설 현장 추락사고, 지난 9월 3명의 사상자를 낸 삼성전자 기흥공장 이산화탄소 누출사고, 지난 3월 경기 남양주시 이마트 도농점에서 무빙워크를 수리하던 20대 노동자가 숨진 사고 등 올해 벌어진 산재 사망사고의 상당수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하청업체 직원들에게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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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태안화력발전소 하청업체 노동자가 작업 중 숨진 자리 근처에 사고지역을 알리는 팻말이 서 있다. 남지원 기자


200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10년간 조선업 현장에서 발생한 업무상재해 사망자 324명 중 257명이 하청노동자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올해 활동했던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는 “중대재해를 예방하려면 다단계 하도급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6년 ‘사내하도급과 산업안전’ 보고서에서 “사내하도급 구조 자체가 산재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하도급업체는 설비투자 능력이 없는데 수시로 공기 단축이나 비용절감 압력을 받는다. 그러니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기 어렵고, 하청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무환경 때문에 근속기간이 짧아 숙련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숨진 김씨도 입사 3개월차에 불과한 1년 계약직 직원이었다.

원청의 안전보건교육이나 안전관리에서 배제된 채 원청 노동자들이 꺼리는 위험한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는 “이번 사건을 단순히 안전사고 문제로만 본다면 현장의 기술적인 문제나 관행, 문화의 문제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며 “비용을 줄이겠다며 위험한 업무를 외주화하는 시스템을 살펴봐야 한다는 당사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서부발전은 16일 “고 김용균씨 유가족과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며 “사고 진상규명을 위해 관계기관의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조사결과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사과문을 냈다.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사업장 전 영역을 철저히 개선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노동을 존중하는 정부의 방침이 잘 이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지만, 하청 구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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