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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나태'는 제작진의 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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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배가 부르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란 말이 있다. 게으른 인간의 본성을 적절히 빗댄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말의 실체는 방송 제작 현장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소위 프로그램이 조금 '잘나간다'는 징조가 보일 때이다.

제작진의 아이템 회의 풍경은 시청률 하락기와 상승기에 따라 미묘한 변화가 있다. 시청률 하락기엔 주로 "시청자가 좋아할까?" "우리 시청층이 이해할까?"라는 대화가 오간다. 어떻게든 눈높이를 맞춰 시청자의 마음을 얻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런데 시청률이 좀 상승하고 나면 이 대화가 묘하게 달라진다. "모양 빠지게 그런 것까지 해야 해?" "그건 내 생각이랑 좀 다른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템 결정에 '시청자'가 사라지고 제작진 취향만 남는다. 정답 없는 시청자 눈높이를 고민하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쉬운 길이기도 하다. 즉, 나태에 빠지는 순간이다.

나태는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도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하던 대로 해도 시청률 나올 텐데 왜 굳이 바꿔?"라며 작은 모험도 시도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매번 같은 구성에 같은 출연자가 나오는 '붕어빵 방송'이 전파를 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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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나태를 제일 먼저 눈치 채는 사람이 바로 시청자이다. 리모컨만 돌리면 얼마든지 새롭고 재밌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는데, 굳이 취향에도 안 맞는 붕어빵 방송을 참고 봐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나태를 제일 늦게 깨닫는 것이 제작진이다. 시청자가 마음을 돌리는 순간에도 어쩌다 잘 나온 최고 시청률에 취해 '또 잘 나올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다시 쉬운 선택을 한다.

물론 같은 구성으로 몇 십 년 장수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도 속을 잘 들여다보면 아주 미세하지만 시청자의 취향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시청자의 눈높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프로그램은 아무리 인기가 좋았다 하더라도 결국 끝을 맞고야 말았다. 이래서 시청률 좀 올랐다고 제작진은 마냥 웃을 수 없다. 언제라도 '나태 경보'가 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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