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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박훈의 역사 서재] 나를 무릎 꿇린 敵에게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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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의 무대 뒤

조선일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수업 교재로 쓸까 하고 오랜만에 다시 펼쳤다 놀랐다. 이렇게 좋은 책이었나? 메이지유신 외교사의 대가 이시이 다카시가 쓴 '메이지유신의 무대 뒤'(일조각)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정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했다. 훌륭한 역사 연구와 훌륭한 역사 서술이 같은 재능은 아닌데, 이 저자는 양쪽을 다 타고났다 보다.

19세기 후반 서양 압력에 직면했을 때, 일본에서도 과격한 양이(攘夷·서양 오랑캐 축출) 운동이 일어났다. 그 점 조선·청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내용은 사뭇 달랐다. 일본의 양이론자는 서양을 쫓아내기 위해서 급격한 국내 개혁을 촉구했다. 양이는 30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 충격을 가하는 수단이었다. 양이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해외무역이 불가피하다는 속내를, 사석에서는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해외무역 말고 부국강병에 필요한 재원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일본 농민은 그 정도 증세를 받아들일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선·청과 달리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농민 반란이 없었던 것은 위정자들이 농민 착취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이러니 양이를 내던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863, 1864년 막부 타도의 선봉이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두 봉건 영주가 서양을 상대로 전쟁을 감행했다. 결과는 참패. 사무라이의 기개도 최신 병기 앞에서는 희극배우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 발발(1868) 4년 전이었다. 이때부터 사쓰마와 조슈는 표변한다. 서양에 유학생을 몰래 파견하고(이때 영국 유학생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일본에 와 있는 서양 외교관들과 빈번하게 만났다. 나가사키의 무역상 글로버에게서 최신 무기도 대량으로 사들였다.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는 사카모토 료마가 이 장면에서 활약했다. 이런 사쓰마·조슈를 잡으려니 막부도 급격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결국 1864년부터 메이지유신이 발발하는 1868년까지 4년간은 전근대 정권 막부와 혁명 세력 막부 타도파의 대결이라기보다, 양자의 '근대화 경쟁'이었다. 승리는 막부 타도파에게 돌아갔지만, 그래서 탄생한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 막부가 남겨 놓은 근대적 공장, 관료, 기술자, 경제인, 군인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당시에 가장 개명하고 서양에 정통한 인재들이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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