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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내 책을 말한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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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


만년필은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만년필'이란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눈길을 주고 귀를 쫑긋 세운다. 만년필의 물성(物性)이 주는 매력을 알기 때문이다. 펜촉이 종이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느낌, 오랫동안 내 손과 함께하면서 점차 만들어지는 나만의 필기감, 중력과 모세관 현상 등 자연의 힘이 더해져야 글이 써지는 원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만년필이 인간과 함께한 이야기, 그러니까 인문과 역사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면 만년필의 매력에 더욱 빠진다. 학생들이 많이 썼던 초록색 파커45를 청록파 시인 박목월 선생이 즐겨 사용했다거나, 펜촉이 살짝 드러나 답답해 보이는 파커51이 아이젠하워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항복 문서를 받아낼 때 서명한 역사적 만년필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 만년필들이 이전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마술(魔術) 같은 일이 벌어진다.

'나'의 추억이 오롯이 새겨진 만년필이라면 애정은 배가된다. 몇 년 전, 누나가 회사 노래자랑에서 상품으로 받아서 쓰다 물려준 낡은 파커21을 수리하러 만년필연구소에 온 분이 있었다. 누나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만년필을 보면 누나 생각이 난다고 했다. 실은 그 파커21이 가짜였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말끔하게 수리해드렸다. 만년필을 받아든 그분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환했다. 내가 고친 것은 만년필이 아니라 물건에 얽힌 소중한 추억이었기 때문이다.

'만년필 탐심'(틈새책방)은 이런 이야기다. 40년 가까이 만년필에 빠져 '탐(貪·바라다)'하고, '탐(探·연구하다)'하는 과정에서 조우한 만년필, 사람, 역사를 담았다.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낡은 만년필을 다시 꺼내 추억을 떠올릴 텐데, 그렇다면 내 책은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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