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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마크롱 항복한 ‘노란 조끼’…SNS 타고 정책 바꾼 ‘현대판 프랑스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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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노가 있고 많은 국민이 이런 감정을 공유한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노란 조끼(Gilets Jaunes)’에 대한 항복 선언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격화된 ‘노란 조끼’ 시위가 마크롱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유류세 인상 반대 시위에서 반(反)마크롱 시위로 번진 노란 조끼 시위가 지난달 17일부터 약 한 달간 이어지자 마크롱 대통령은 10일(현지 시각) 저녁 엘리제궁에서 생방송으로 13분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최저임금 인상·사회보장세 인상 철회 등 시위대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지난 5일에는 유류세 인상 계획을 취소했다. 물론 그의 대표정책인 부유세 인하 정책은 고수하기로 했다. 지난 4주간 토요일마다 열린 네 차례 ‘노란 조끼’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70만명을 넘어서자 마크롱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며 단기간에 기존 경제정책 방향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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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일 파리 개선문 앞에서 노란 조끼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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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영상으로 시작된 노란 조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추진한 유류세 인상이 시작이었다. 유류세는 휘발유·경유 등 기름 소비를 줄이기 위해 부과하는 세금이다. 정부가 내년 1월에 유류세를 추가로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경제적 부담이 커진 시민의 불만이 폭발했다.

불만은 소셜미디어(SNS) 페이스북을 타고 퍼져나갔다. 대서양 연안 브르타뉴 지방 소도시 보알에 사는 51세 여성 아코디언 연주자 자클린 무로가 지난 10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이 노란 조끼 시위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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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 보알에 사는 아코디언 연주자인 51세 여성 자클린 무로가 지난 10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이 노란 조끼 시위를 촉발했다. /자클린 무로 페이스북


무로는 페이스북에 "프랑스는 어디로 가느냐. 침묵하는 건 공범이 되는 것"라는 글을 올리고 4분 38초짜리 영상에서 "엘리제궁의 그릇을 바꾸고 수영장을 설치하는 것 외에 프랑스인의 돈으로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가. 당신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비판했다. 영상은 곧 어마어마한 반응을 얻었다. 조회 수만 624만에 달한다. 영상은 26만2300번 공유됐고 ‘좋아요’는 4만5000개에 이른다.

시위에서 노란 조끼를 입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건 프랑스 남부 도시 나르본에 거주하는 36세 자동차 정비공 지슬랑 꾸따르다. 프랑스 운전자가 긴급상황에 대비해 형광색 노란 조끼를 의무적으로 비치한다. 시위대 복장과 이름 모두 여기에서 따왔다.

‘베스트맨(조끼남)’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그는 지난 10월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상을 올리고 사람들에게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면 같이 노란 조끼를 입고 시위하자고 촉구했다. 540만번 재생된 이 영상은 파리를 노란색 물결로 뒤덮게 하는 촉매제가 됐다. 노란 조끼 시위는 지금까지도 수십만명이 가입한 여러 페이스북 그룹을 중심으로 소통하고 있다.

② 공식 대표자 없는 시위

‘현대판 프랑스 혁명’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란 조끼 시위에는 공식 대표가 없다.

대신 맨 처음 페이스북에 동영상을 올린 무로가 노란 조끼 시위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최근에 에두아르 필리프 프랑스 총리가 마련한 정부와의 대화 자리에 시위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다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첫 노란 조끼 시위가 열리기 하루 전인 지난달 16일 프랑스3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이 운전자와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평화적 시위를 통한 정부 압박을 주장해온 무로는 여러 취재 요청에 응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노란 조끼 운동 내부의 평화주의자들의 모임인 ‘노란 조끼 자유’를 꾸려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와의 협상을 주장하며 마크롱 대통령에게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티에리 파울로 발레트와 벤자맹 코시도 각각 시위대 지도자와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다. 이들은 무로와 함께 노란 조끼 시위를 처음부터 함께해 왔다. 발레트는 ‘국가평등운동’ 모임의 설립자이자 수년간 시위를 조직·운영해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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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서 노란 조끼를 입자고 처음으로 제안한 프랑스 남부 도시 나르본에 거주하는 36세 자동차 정비공 지슬랑 꾸따르. /지슬랑 꾸따르 페이스북


③ 서민에게 불리한 경제 정책을 바꿔라

공식 대표자와 중심 기구가 없으니 요구사항 목록도 뚜렷하지 않다. 시위대는 굵직하게 세금 감면 등 서민이 살아가기에 불리한 경제정책을 바꾸거나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유류세 인상이 노란 조끼 시위에 처음 방아쇠를 당긴만큼 시위대는 유류세 인하를 요구했다. 유류세 인상은 상대적으로 서민에게 고통이 더 큰 조치다. 마크롱 정부는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겠다며 지난 1년 동안 경유와 휘발유에 부과하는 세금을 각각 23%, 15%씩 올렸는데, 그 결과 차를 타고 도심으로 출퇴근 하거나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는 서민의 경제적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노란 조끼 시위대는 연금 수급자의 사회보장세 인상 철회도 주장했다. 또 마크롱 대통령은 2019년과 2020년 연금 지급액을 0.3%씩만 인상하겠다고 했다. 물가상승률을 밑도는 인상률로 실질적으로 연금이 깎이게 된 은퇴자들은 원성을 높였다. 이밖에도 부유세 부활과 거주세 인하,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했다.

④ 유류세 인상에서 反마크롱 시위로…노란 조끼의 승리

유류세 인상으로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는 곧 반(反)정부·반 마크롱 시위로 확대됐다. 폭력 시위대뿐 아니라 마크롱에게 불만이 쌓인 평범한 시민들이 대거 동참해 거리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사퇴하라"고 외쳐댔다.

노란 조끼 시위는 부자를 위한 감세, 높은 실업률, 빈부 격차, 성장 둔화 등 복합적 이유로 벌어졌다. 마크롱 정부가 담배세·유류세 등 생활 밀접형 간접세를 대폭 늘리면서 국가 지원에서 벗어난 서민층 생활고가 커지자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부유세를 인하하고 고용 유연성을 높이는 등 마크롱 정부의 투자 활성화 정책이 부유층에만 유리해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개혁을 서두르면서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은 부족했던 마크롱 정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터져 나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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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18년 12월 10일 대국민 담화에서 4주째 이어진 시위대의 요구를 상당수 받아들이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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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크롱 대통령이 굴복했다. 온갖 저항에도 후퇴를 모르고 개혁 조치를 밀어붙여 왔던 마크롱이지만 3주째 노란 조끼 시위가 이어지자 지난 4일 결국 유류세 인상을 미루기로 했다. 이날 필리프 총리는 대국민 담화로 "내년 1월부터 경유와 휘발유에 붙는 유류세를 인상하겠다는 방침을 6개월간 유예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스요금과 전기료 인상 계획도 6개월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크롱 대통령이 유류세 인상 유예를 발표했지만 경제적 불평등을 문제삼은 시위대는 오히려 시위를 그만두지 않고 반정부 시위로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 조치는 너무 늦은 데다 충분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 지지율은 지난해 5월 취임 이후 최저 수준인 21%까지 곤두박질쳤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시위 4주차인 10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시위대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줬다. 유류세 인상은 아예 철회했다. 연금 수급자의 사회보장세 인상 방안도 취소했다. 프랑스 정부는 내년 1월부터 은퇴자가 내야 하는 사회보장기여금을 1.7% 인상하기로 했는데 이를 백지화한 것이다. 최저임금은 내년 1월부터 100유로(약 12만8000원)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초과 근무에 따른 임금 지급분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는 방침도 발표했다.

다만 부유세 원상 복구 요구만큼은 거부했다. 그는 "대신 탈세·탈루 등 조세회피에 강력히 대처하고 공공지출을 감시하는 체제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또 대기업들이 사회보장에 더 기여해야 한다면서 다음 주에 기업인들을 불러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노란 조끼 시위대의 승리다.

⑤ 폭력 시위에 경제 둔화 예상…경제적 손실은 어쩌나

그러나 노란 조끼 시위는 프랑스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시위가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한 달간 지속되면서 서비스업 활동이 감소하고 교통·요식업·자동차부품 등 부문이 위축됐기 때문이다. 또 시위대가 주요 도로 등을 점거하면서 교통 체증 등 큰 혼란이 벌어졌다. 겁에 질린 관광객은 파리 방문을 취소하고 있다.

가장 최근 시위였던 지난 8일, 노란 조끼 시위로 프랑스 전역에서 13만6000여명이 모여들자 파리에 있는 유명 관광지와 공연장 등이 문을 닫았다. 대규모 폭동과 약탈이 예상되자 파리 경시청은 파리 최대 번화가 샹젤리제 거리의 상점·음식점에 ‘당일 영업을 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에펠탑·루브르 박물관 등이 폐쇄하기로 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오페라 바스티유 등 파리 중심가에 있는 공연장도 계획된 공연을 취소했다. 예정된 축구 경기도 이날 열리지 않게 됐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전문가들은 프랑스 연말 경제성장이 둔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장관은 지난 9일 약탈 등으로 피해를 본 파리 시내 상점 등을 둘러보면서 시위로 인한 불안이 "경제에 재앙"이라고 밝혔다. 르메르 장관은 "상공인들과 기업인들에게 경기둔화는 기정사실이고, 폭력시위대의 습격과 약탈을 당한 상점주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프랑스 중앙은행 ‘방크 드 프랑스’도 10일 올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0.4%에서 0.2%로 내렸다. 한 달 전부터 크게 확산한 노란 조끼의 대규모 연속 시위가 경제 전반에 영향을 줬다는 이유에서다.

[이다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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