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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매경이 만난 사람] 김희중 대주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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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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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렇게 선한 얼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노력한 결과일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71·세례명 히지노)를 가까이서 본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이다. 겨울비가 종일 내리던 날.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소문처럼 선했다. 눈빛도 걸음걸이도 말투도 생각도 모두 선했다. 마주치는 사람이 성직자든 직원이든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깍듯하게 존대하는 목소리가 낮고 편안했다. 기자가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다른 층으로 이동할 것을 청했다. 이어지는 일정 때문에 다급한 와중에도 그는 인자한 얼굴로 답했다.

"원하는 대로 하죠. 저는 원래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편입니다."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내공이 강한 사람일수록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격언도 떠올랐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종교에 대한 신뢰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통계가 있다.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에 몸담고 있는 구성원들 문제다. 어느 공동체나 이상과 목적이 있다. 구성원들이 공동체 이상에서 일탈할 때 문제가 생긴다. 모든 분야가 그렇다. 정치 문제는 헌법 문제라기보다는 정치가들 문제다.

―혼돈의 시대에 종교 의미는.

▷종교는 초월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다. 그 초월의 밑바탕에는 희생이 있다. 가치 기준이 물질주의와 편의주의에 빠지면서 희생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 종교 역할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시대에 따라 종교의 표현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종교는 사랑과 희생이다.

―세간에서는 대주교님을 진보 성향으로 분류하는데.

▷나는 진보라기보다 원칙주의자다. 진보나 보수나 철학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칙주의자다. 철학이 없는 진보는 계급투쟁에 불과하고 철학이 없는 보수는 기득권 지키기에 불과하다. 나는 보수와 진보가 손잡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서로 손잡아야 발걸음 급한 진보는 뒤를 돌아보고, 안주하는 보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다름'을 '틀림'으로 본다. 하지만 다름은 다름일 뿐이다. '다른 색깔'을 '틀린 색깔'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다양한 다른 색깔이 좋은 그림을 만드는 것 아닌가. 다양한 꽃이 있어야 정원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사회도 서로 존중하고 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정치인이 달라져야 한다. 정치는 대화의 예술이다.

―월남전에 참전하셨는데.

▷신학생 때 월남전에 다녀왔다. 미군 통역병으로 전쟁의 시작과 끝을 다 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은 이기고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짓도 허용되는 것이다. 전쟁 앞에서는 인간성마저 무용지물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이 '전쟁도 불사한다'는 말이다. 전쟁을 막기 위한 비용은 얼마를 쏟아부어도 과하지 않다. 무고한 생명과 공동체를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철학의 빈곤이 문제다. 사람이 왜 사는지,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이런 고민과 사색이 부족하다. 우리는 '왜'라는 문제보다 '어떻게'에만 집착한다. '왜'라는 근본적 물음을 무시하고 자기 편한 방법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정치철학이, 경제는 경제철학이 부족하다.

―최근 북한에 다녀왔는데.

▷2011년과 2015년에도 갔다. 이번에 많이 달라졌더라. 거리도 밝아지고 휴대폰 가진 사람이 늘어난 게 놀라웠다. 거리 동영상도 찍어 왔다. 찍는 데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큰 변화였다. 천천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시장경제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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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북은 가능하다고 보는지.

▷교황 방북을 놓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으로 안다. 북한 인권 문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신자도 별로 없는 북한에 굳이 왜 가느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한다. 인권 문제가 거론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교황이 가야 한다. 신자 수도 의미가 없다. 복음에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자 수가 적으면 오히려 더 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떤 분인가.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런저런 벽을 전혀 개의치 않는 자유로운 분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든지 다 수용하는 자비로운 분이다. 특별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많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시절 어려운 봉사를 하기 위해 세계 각지 수도회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한국의 한 수녀원만이 도와주기 위해 달려온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부터 한국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됐던 것 같다.

―통일이 가능하다고 보는지.

▷강 수위가 다른 운하를 통과할 때는 수위를 맞춰주는 갑문을 거쳐 가야 한다. 통일도 마찬가지다. 서로 왕래하면서 이념, 가치, 경제적 격차가 해소된 다음에 무르익지 않을까 싶다. 민족의 동질성을 바탕에 둔 평화공동체가 우선인 것 같다. 일단 전쟁 위험만 사라져도 그게 어딘가. 화학적 결합과 같은 전격적 통일은 현실적으로 당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요즘 무슨 기도를 많이 하나.

▷내 기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 소외된 사람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또 사회가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똑똑한 사람이 백 걸음 앞서가는 것보다 열 사람이 열 걸음 가는 게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고 싶었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대가족 속에서 질서도 배우고 양보와 타협도 자연스럽게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지금 이 자리에 왔다. 하지만 굴곡도 있었다. 장난꾸러기 기질이 있었는데 청소년 시절 호기심에 술·담배를 입에 대 본 적도 있었고, 결혼하고 싶어 신학교 가는 것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구체적 순간이라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했는데, 오해를 받았을 때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알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어려움을 넘겼다. "나는 하느님의 몽당연필입니다"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도 힘이 됐다.

―가장 존경하는 분은.

▷하느님 빼놓고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1182~1226년)을 존경한다. 자연과 평등했고 복음 말씀 그대로 살았던 분이다. 개신교 역사학자들도 예수님을 가장 닮은 인간이라고 인정한다. 수도회 설립을 위해 만든 수도규칙을 들고 당시 교황을 찾아갔을 때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반려당했을 정도였다. 그는 누구도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초기 교회사를 전공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선포된 하느님 말씀이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 어떻게 뿌리내렸는지 연구하고 싶어서였다. 고대 교회사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가톨릭 위기 때마다 모든 개혁가는 시초의 정신, 즉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초심에서 멀리 벗어날 때마다 개혁을 통해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취미가 있는지.

▷축구를 좋아한다. 나는 달리기가 빠른 편이어서 포지션이 리베로였다. 경기를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대표팀 경기와 한국 선수가 뛰는 팀 경기에 관심이 많다. 요즘은 손흥민이 뛰는 토트넘, 기성용이 뛰는 뉴캐슬 경기를 보려고 하는 편이다. 태권도 유단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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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가고 싶나.

▷참 아름답고 행복한 생활이다. 한 가정을 포기하고 더 큰 가정을 얻는 일이다. 좋은 뜻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일에 제재를 덜 받을 수 있어 좋다. 가정이 없으니 가난하게 살아도 되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몸 사릴 필요도 없다.

―청소년에게 기운 나는 말을 해준다면.

▷기대치를 높게 잡지 말고 현실에서 힘을 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희망은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는 등불이다. 희망은 실패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포기하지 말자. 나는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이뤄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일단 최선을 다한 다음에 기도하자.

―현 정권에서 천주교가 우대받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오해인 것 같다. 평양에 갔을 때 다른 종교인들 놔두고 나만 따로 누구를 만났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무슨 우대가 있겠는가. 다 소설이다(웃음).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 가톨릭도 변신이 필요하지 않은지.

▷개혁은 필요하지만 변질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근본 원리는 고수하되 표현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려져야 한다. 1961년부터 열린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논의 과제가 '교회의 현대 적응'이었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현대인의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 그건 영원히 필요한 정신이다. 교회는 현대인을 이끄는 게 아니라 현대인과 동행해야 한다.

―한국은 종교 갈등이 거의 없는 편이다.

▷국제회의에 가면 그와 같은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국 종교지도자들은 서로 '타 종교'라고 부르지 않고 '이웃 종교'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말을 한다. 교리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이웃 종교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가치는 서로 소중하게 존중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한마디 한다면.

▷나눔이 확산돼야 한다. 기부문화가 아직 부족하다.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분배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배의 무게중심은 늘 밑에 있어야 한다. 무게중심이 높은 배는 침몰한다. 기층 대중의 삶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하다.

▶▶ 김희중 대주교는…

1947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해 살레시오고등학교와 대건신학대(현 광주가톨릭대)를 나왔다. 1975년 사제수품을 받고 유학길에 올라 로마 그레고리오대에서 교회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본당 신부와 신학교 교수를 하다 2003년 주교품을 받았다. 2010년 광주대교구장이 됐으며 현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자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의장이다. 교황청 종교간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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