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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뉴스분석] 2년 넘게 헛도는 광주형 일자리, 벤치마킹부터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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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다르고

지방정부가 자본금 21% 분담 땐

한국선 공공기관 … 독립경영 힘들어

임·단협 유예도 현행 노동법 위반

시장환경 다른데

90년대와 달리 차 시장 포화상태

현대차가 위탁생산 맡기더라도

몇 년 못가 물량 감소로 다시 위기

겉으로만 따라하니

국내 노동법조차 제대로 안 살피고

벤치마킹하며 보고싶은 것만 본 셈

치밀한 분석, 제도개선부터 했어야

중앙일보

광주형 일자리의 출발점인 기아차 광주 2공장 생산라인. 준공 25년 만에 누적생산량 300만대를 돌파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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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 일자리는 여러모로 이목을 끌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기업을 육성하고 체질을 강화해 일자리를 늘리는 형식이어서다. 지자체와 노사, 여기에 민간까지 연대해서 ‘지역 고용 커뮤니티’ 라는 선진형 모델 탄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중앙 정부 중심의 고용 정책에서 지역 중심의 일자리 정책으로 변신을 꾀한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좌초 위기에 놓였다. 언론과 정치권, 학계에서 원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노사정 모두에게 조금씩 책임을 묻는 모양새다. 노조의 이기주의 때문이라고도 하고, 기업의 의지 부족이나 지자체와 정부의 주먹구구 행정 때문이라고도 한다. 과도한 정치권의 개입도 빼놓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노사 간의 신뢰가 있었다면 툭하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노출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2년이 지나도록 원점을 맴도는 원인이 뭘까.

겉핥기 벤치마킹

광주형 일자리는 폴크스바겐 본사가 있는 독일 볼프스부르크시를 벤치마킹하면서 시작됐다. 폴크스바겐은 협력회사를 포함해 볼프스부르크시의 고용인원 중 60%를 책임졌다. 그러나 1992년 경영위기를 맞는다. 순수익이 전년보다 87%나 급감했다. 이듬해에는 적자로 돌아섰다. 이 회사 근로자 임금은 경쟁사보다 20% 정도 높은 상태였다. 한국 자동차기업과 비슷한 상황에 내몰린 셈이다.

폴크스바겐은 구조조정에 착수하려 했다. 해고 예상 인원이 무려 3만명에 달했다. 당시 볼프스부르크 인구의 4분의 1이다. 공장도 헝가리로 이전할 방침이었다. 시와 니더작센주 금속노조(IG Metal), 폴크스바겐, 시민이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탄생한 게 볼프스부르크㈜다. 시와 폴크스바겐이 각각 50%씩 지분을 분담했다. 지역 노사민정이 한 테이블에서 고용문제를 논의한다는 점에서 광주형 일자리와 맥을 같이 한다. 선진형 지역 고용 커뮤니티 모델이다.

문제는 한국에선 지방 정부가 50% 이상 출자하면 정부투자기관이 된다. 한국조폐공사나 농어촌진흥공사 같은 곳이다. 정부의 입김에 독립적인 경영을 기대하기 힘들다. 광주시는 자기자본금의 21%(590억원)를 출자하는 쪽으로 정했다. 그래도 정부출자기관이 된다. 한국산업은행, 수출입은행, 한국방송공사가 이에 속한다.

이 역시 볼프스부르크㈜처럼 독립적인 운영이 어렵다. 자동차 산업은 수요와 공급이란 시장논리가 철저히 적용되는 사업이란 점을 감안하면 독립경영은 필수다. 자칫하면 어려울 때마다 돈을 퍼붓는 또 다른 돈 먹는 공기업이 될 수도 있다. 이를 해결할 제도 개선이 우선돼야 광주형 일자리를 위한 신설법인의 경영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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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 일자리와 볼프스부르크 지역 커뮤니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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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도시재생 간과

광주형 일자리는 이름 그대로 일자리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폴크스바겐㈜는 단순히 일자리 문제만 다루는 회사가 아니다. ‘도시재생’이라는 지속가능한 지역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는 회사다.

90년대 볼프스부르크시는 유령도시에 가까웠다. 책을 하나 사려고 해도 차로 40분을 나가야 했다. 폴크스바겐 직원도 볼프스부르크를 버리고 외곽으로 나가 출퇴근했다. 매년 1억~2억 유로의 구매력이 주변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볼프스부르크시는 일자리도 도시 활력이 되살아나야 가능하다고 봤다. 폴크스바겐의 위기가 유령도시로 전락시킨 게 아니라는 진단을 내렸다. 여가와 관광, 비즈니스 등 모든 걸 수용할 수 있는 도시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었다.

볼프스부르크㈜는 이를 염두에 두고 창립됐다. 부품단지 개발, 과학센터 설립, 학교 유치, 체육시설, 창업과 비즈니스 컨설팅, 교통체계 개선, 무역박람회, 환경과 에너지사업 등 도시개발형 업무를 수행한다. 도시 곳곳에 ‘볼프스부르크㈜’라는 깃발이 걸린 곳은 볼프스부르크㈜가 기획하고 개발한 거리이거나 시설이라는 표시다.

이런 노력 덕분에 도시 전체가 콘텐트로 채워져 갔다. 폴크스바겐의 자동차 테마파크인 아우토슈타트는 이런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따라 만들어졌다. 지금은 볼프스부르크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한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300만 명이 넘는다. 낮은 임금에 초점을 맞추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광주형 일자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글로벌 수준 못 따라가는 법·제도

물론 볼프스부르크㈜가 처음 출발할 때는 고용에 무게 중심이 쏠렸다. 불어나는 실업자와 청년 일자리 해결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한데 일자리 창출 방식이 독특했다. 볼프스부르크㈜는 인력 파견 회사에 가까웠다. 실업자와 청년들을 직접 훈련시켜 폴크스바겐이나 부품회사, 지역 내 서비스업체에 공급했다. 한때 폴크스바겐에는 이 회사에서 파견된 인력이 1만 명에 달했다. 심지어 2010년 3월에는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10 글로벌 채용 박람회장’에 볼프스부르크㈜가 참여했다. 정보통신(IT)과 기계기술 엔지니어 10명을 선발했다. 폴크스바겐을 비롯한 볼프스부르크에 소재한 회사에 파견할 인력이다.

니더작센주 금속노조는 볼프스부르크㈜를 적극 활용하도록 조합원을 상대로 홍보한다. 파견 홍보를 하는 셈이다. 파견인력을 무조건 원청에서 직접 고용하라고 압박하는 한국 정부나 노조와 차원이 다르다. 이 회사 헤닝 에켈(Henning Eckel) 전 대표는 “지자체가 직접 파견회사를 차려 인력을 공급하면서 인력에 대한 일종의 품질 보증이 돼 독일 내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는 지자체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제조업 파견은 금지돼 있다. 불법파견이 된다. 박람회를 열어 파견 인력을 뽑으면 난리가 날 일이다. 볼프스부르크의 사례를 따라 하려야 할 수가 없는 셈이다. 더욱이 폴크스바겐은 따로 공장을 설립하지 않았다. 볼프스부르크㈜ 인력에 본사 공장의 라인 중 한 개를 내줬다. 그곳에서 소형 SUV인 티구안을 전량 생산했다. 티구안은 최고 품질과 가격 경쟁력으로 소형 SUV 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티구안을 만들던 이들은 10년이 안 돼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광주형 일자리는 자동차 공장을 새로 만든다. 현대차가 물량을 위탁하면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노조의 반발과 파견법 규제 때문에 우회로를 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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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 일자리’ 어떻게 추진돼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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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도 포화 상태

문제는 자동차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점이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시설 과잉”을 주장하는 것은 틀린 얘기가 아니다. 올들어 미국의 자동차 판매는 0.4% 성장하는 데 그쳤다. 유럽도 1.5%였다. 최대 시장이던 중국은 -1.2%로 곤두박질쳤고, 한국도 0.8% 감소했다.

볼프스부르크처럼 자동차를 통한 고용 벤치마킹을 하면서 정작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안 본 셈이다. 시장 포화 상태에선 설령 현대차가 광주 빛그린단지에 위탁 생산을 맡기더라도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몇 년 못 가 위탁 물량이 확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GM이 빠져나간 군산 꼴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다 보니 현대차로선 정치권의 압박까지 더해지며 광주형 일자리를 느닷없이 돌출한 경영 변수 또는 리스크로 여길 수밖에 없다. 협상에 참여는 하지만 투자 의지가 있었던 게 아니다. 자동차 시장이 활황이던 때의 폴크스바겐과는 딴판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척이 될 리 만무하다. 첫 단추를 끼울 구멍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고 꿰려 한 꼴이다.

아마추어형 정책 추진

노동계가 광주시와 현대차의 잠정 합의안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임·단협 유예다. 생산량이 35만 대 될 때까지 처음 책정한 임금과 복지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매년 위탁 생산량이 7만 대인 점을 감안하면 5년 정도다.

노조는 “현행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반발했다. 광주시도 이 항변엔 답을 못했다. 노조의 주장이 맞기 때문이다. 현행 노동법상 임금협약의 유효기간은 1년, 단체협약은 2년이다. 선진국은 보통 3~5년이다. 그렇다고 현대차의 5년 유예 요청을 물리치기도 어렵다. 매년 임금협상을 하게 되면 첫해에는 협약대로 3500만원을 지급할 수 있지만, 이듬해 노사 협상에서 노조가 얼마나 올려달라고 할지 가늠하기 힘들어서다. 매년 급격하게 인상하면 금새 현대차 근로자와 비슷한 수준이 될 수 있다. 현대차로선 투자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김대환 전 노동부장관(인하대 명예교수)은 “벤치마킹을 하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덧붙여 국내 노동법이나 제도마저 살피지 않은 무감각이 광주형 일자리를 좌초시킨 원인”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경영진, 노조와 사전에 볼프스부르크 사례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을 선행하고, 한국에 이식할 수 있는 부분을 추려내고, 법·제도 개선이 필요하면 그걸 선행시키는 게 우선인데, 그게 빠졌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종합하면 결국 광주형 일자리와 같은 지역 고용 커뮤니티가 성공하려면 법과 제도가 바뀌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치권이 지원금으로 당근책을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셈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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