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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 (토)

떠난 부시… 절제와 사명 중시한 'WASP 향수'를 불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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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사회, 왜 부시를 칭송하나

WASP, 오늘의 미국 이룬 지배층

부시, 18세 때 태평양전쟁 참전… 특권따른 의무 다한 '와스프 모범'

"핵전쟁 위협이 따른 냉전에서 미국과 세계를 이끌어낸 최고의 공복(워싱턴포스트)" "더 나은 미국을 자신의 진정한 사명으로 믿었던 정치인(뉴욕타임스)" .지난달 30일 숨진 미 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94)에 대한 칭송 속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와스프(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인 집단)에 대한 향수가 함께 일고 있다.

WASP는 미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최상류층 출신으로 명문 기숙학교와 하버드·예일 등의 아이비리그 대학을 거쳐 각 분야 권력을 장악한 미 기득권층을 일컫는 말로, 1960년대 초 펜실베이니아대 사회학자 E 딕비 발첼이 만든 조어(造語)다. 타고난 부(富)와 태생을 기반으로 신(新)귀족층이 된 WASP는 겉으론 품격을 따지면서 잔인한 제국주의 팽창을 했고, 부하들의 손을 빌려 추악한 정치를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조선일보

지난달 30일 별세한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관을 실은 4141호 열차가 6일(현지 시각) 텍사스주(州) 스프링에서 장지인 텍사스 A&M 대학 인근 기차역으로 가고 있다. 이 지역에서 2005년부터 운행되고 있는 4141호는 41대 대통령이었던 부시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날 철로가에 시민 수천 명이 모여 성조기를 흔들며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배웅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신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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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 월간지 애틀랜틱은 지난 2일 "WASP에겐 지금 미국 엘리트들에겐 실종된, 특권에 따르는 사명과 의무를 중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이 있었다"고 전했다. 조지 부시의 경우 아버지가 코네티컷주의 금융가이자 연방 상원의원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5월 명문 기숙학교 필립스-앤도버 졸업과 동시에 18세에 곧바로 해군 조종사 훈련을 받고 참전했다. 미 역사상 가장 어린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이 몰던 전투기가 격추돼 죽음 직전에 구출됐지만, 이후에도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예일대 진학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였다. 그래서 조지 부시는 미 언론에서 특권에 따르는 의무를 다한 '마지막 WASP 대통령'으로 불린다. 지금의 WASP 향수는 그의 이런 덕목에 대한 그리움이다.

NYT는 WASP는 개인적 엄격함과 종교적 경건성, 세계주의의 덕목을 소중히 여겼다고 보도했다. WASP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공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 공직을 맡는 것을 숭고하게 여기게 키웠다. 이런 덕목으로 무장한 WASP 출신의 젊은이들은 기계공·농부들과 나란히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고, 교회 선교사와 국가의 외교관으로 전 세계 오지로 나갔다는 것이다. NYT는 "그들의 범세계주의(cosmopolitanism)는 종종 문명적으로 앞선 백인에겐 '저급한 종족'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인종차별적 성격도 띠었지만, WASP 세대의 아랍·중국·히스패닉 전문가들은 지금의 천박한 다문화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미국 밖 세계를 잘 이해했다"고 평했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선 WASP 귀족 집단을 대체해 인종·출신 계층 면에서 좀 더 다양하고 능력주의에 입각한 지배층이 등장했다. NYT는 "여기엔 점차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능력 위주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WASP 집단이 스스로 먼저 해체한 면도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명문 기숙학교의 추천서보다 SAT(대입 표준화시험) 점수가 더 중요시되고 남성 위주 조직에 여성이 더 합류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성된 지배층은 WASP보다 더 민주적이거나 포괄적이지도 않았다. 능력 위주라면서 미 명문대들이 전보다 더 교묘하게 우수한 아시아계 학생들을 배제하는 게 한 예다. 오히려 WASP는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면서 후발(後發) 신분 상승 계층을 포용했다. 그래서 흑인인 버락 오바마가 상원의원·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모르몬교도인 밋 롬니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파리드 자카리아도 6일 "WASP는 운 좋은 출생 덕분에 특권을 누린다는 생각에 자기 절제 의식이 강했지만, 스스로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갔다는 지금의 지배층은 현재 지위를 '합법적으로 얻었다'는 생각에 이런 의식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WASP의 부활을 외치자는 것이 아니라, 현(現) 지배층은 그들의 덕목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NYT는 "WASP에겐 대중과 구별된 가치, 독특한 책임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귀족층을 이루는 길이라는 지혜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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