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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김기천 칼럼] 정부만 성장하는 소득주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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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지푸라기가 낙타 등을 부러뜨린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낙타가 한계의 한계까지 짐을 지고 있다면 짐 무게를 조금만 더해도 등이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한도를 넘으면 파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경제가 위기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에선 한국 경제가 위기 국면에 들어섰거나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반면 정부·여당은 경기 침체라는 진단도 성급하다고 주장한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근 국회에서 "경제 순환상 하방 압력이 있지만 침체나 위기라고 할 것은 아니다"고 했다.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아직은 당장 등이 부러질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다. 지푸라기 하나가 아니라 몇 단을 더 얹어도 될 듯하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징후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경제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위기의 임계점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우선 ‘반도체 착시’ ‘반도체 편식’ 현상이 위험 수위에 이를 정도로 심화됐다. 12월 결산 상장기업들의 1~3분기 영업이익은 작년보다 8%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빼면 작년보다 10%나 줄었다. 두 기업이 상장사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1~3분기 40%에서 올해 1~3분기 50%로 커졌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한국 경제의 주력 산업이 대부분 중병을 앓고 있다. 현상유지도 힘들어 보인다. 특히 생산·고용 비중과 전후방 연관효과가 큰 자동차 산업의 실적 악화가 심각하다. 현대자동차의 3분기 영업이익은 작년보다 76%나 줄어들었다. 그 여파로 상장 부품회사 절반이 적자를 냈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비명이 터져나온다.

스마트폰 산업도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LG전자의 매출과 영업이익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부품업체들이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석유화학·정유·기계 등 그동안 비교적 선방해왔던 산업들도 3분기 들어 실적이 악화됐다. 주력산업이 휘청하면서 경기 회복의 동력이 현저히 약화됐다. 기존 산업을 대체할 새 산업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반도체 산업마저 흔들리고 있다. 4분기 들어 주력 반도체 제품인 D램과 낸드 플래시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여기다 중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독과점 규제에 나설 움직임이어서 이중의 타격이 우려된다. 아직 전망이 엇갈리고 있지만 반도체 호황 국면이 계속 이어지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해지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산업별 전망 보고서에서 반도체를 포함한 ICT 수출이 내년에 1.8%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작년(21.6%)과 올해(16%)의 두 자릿수 증가율에서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연구원은 한국 주요 산업이 대부분 ‘후퇴’, ‘침체’ 국면을 나타낼 것으로 내다봤다. ‘호황’이 기대되는 산업이 전혀 없다는 암울한 예측이다.

공공 부문은 정반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공공행정 및 국방’ 부문은 3분기에 작년 대비 3.7% 성장했다. 1분기 3.3%, 2분기 3.5%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분기 이후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내년에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민간 부문의 잿빛 전망과 비교하면 별세계라고 할 수 있다.

고용도 마찬가지다. 올들어 10월까지 공공행정·국방 부문과 정부 재정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보건·사회복지 서비스업 취업자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8만9000명 늘어났다. 3년전 같은 기간 증가폭(1만9000명)의 4배를 웃돈다. 반면 제조업,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등 고용비중이 큰 3대 업종의 취업자수는 올들어 16만4000명이나 줄었다.

결국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정부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정책이 주력 산업 침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법인세율 인상,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정규직 전환 압박 등으로 인해 기업의 부담이 훨씬 커졌다. 경기 침체와 실적 악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도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협력이익공유제 등 기업을 압박하는 새로운 정책들을 계속 궁리해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짐 때문에 등골이 휠 지경인데 정부가 새 짐을 계속 얹고 있는 것이다. 민간 부문이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이제 체념·포기 상태다. 올들어 설비투자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 방증(傍證)이다. 반면 국내 제조업체의 해외 직접투자액은 올 상반기에 74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나타냈다. 종전 기록이었던 2013년의 47억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해외로의 대탈주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여당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고수를 외치고 있다. "기다리면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주문을 되뇌고 있다. 기업의 사기를 꺾는 정책만 펴면서 어떻게 성장을 견인(牽引)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줄 것"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이러다 정말 등이 부러지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조선비즈 논설주간(kc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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