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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시선]핼러윈, 함께 웃어야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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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마지막 토요일인 27일 저녁, 평소 좋아하는 인디밴드의 콘서트를 보러 홍대입구에 가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학생이 얼굴에 피를 잔뜩 흘린 채 공원 벤치에 앉아 있길래 깜짝 놀라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핼러윈 코스튬”이란다. 분장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정말로 크게 다친 줄 알았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내가 ‘노잼(재미없는) 아재’가 된 것 같아 민망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보는 그 학생을 피해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경향신문

전동차 문이 열릴 때마다 핼러윈 분장을 한 남녀들이 탑승했다. 귀신이나 좀비, 뱀파이어 등을 흉내 낸 코스튬은 꽤 유쾌했는데, 피범벅이 된 분장이라든가 흉기에 의해 부상 입은 피부 절단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페인팅, 머리에 칼이나 도끼가 꽂힌 것처럼 꾸민 장난은 보기에 불편했다. 누가 더 실감나게 자상, 창상, 열상, 절상을 표현하는지 경쟁하는 듯했다. 홍대입구 거리는 영화 <부산행>이나 <이블데드>를 방불케 했다.

왜 서양 명절까지 기념해야 하느냐, 주취 소동과 공공질서 훼손을 일으키는 나쁜 환락 문화가 아니냐, 선정적 복장으로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느냐, 본래 유래와 참의미를 알고서나 따라하는 것이냐… 이런 소리를 할수록 ‘노잼 아재’가 된다는 걸 잘 알거니와 나는 사실 사람들이 핼러윈데이라는 축제를 만끽하는 게 반갑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웃고 즐길 수 있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가. 나도 껴서 같이 놀고 싶다. 다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먼저 갖춘 다음 얘기다.

피와 신체 절단 묘사와 비록 장난감이라지만 칼과 도끼가 거리를 가득 채운 그날로부터 일주일 전, 국민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상상하며 몸서리치고, 나도 너도 우리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공유했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해자의 담당의가 SNS에 올린 글에는 피해자가 당한 끔찍한 죽음의 신체적 증거들이 묘사돼 있었다. 칼로 특정 부위만을 32차례… 피해자와 같은 세대인 10~30대 청년들이 특히 엄중하게 받아들였는데, 담당의의 글에 친구나 연인을 태그(불러오기)하며 “너무 끔찍하다” “잔인한 광경이 그려진다”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댓글을 달던 이들이 불과 며칠 뒤, 하드고어 무비나 다를 바 없는 잔혹한 ‘피 이미지’에 열광하며 핼러윈을 즐겼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물론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살인이나 폭력 범죄 또는 끔찍한 사고의 피해자를 연상시키는 코스튬을 꼭 해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문화라면 어쩔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놀려거든 그 문화가 용인되고 환영받는 곳에서만 즐겨달라는 거다. 클럽이나 축제 현장에 가서 분장하면 될 일이다. 축제에 가기도 전에 벌써 얼굴에 피를 칠하고, 목이 뚫려 뼈와 혈관과 피하조직까지 보이는 상처를 그려놓았다면 대중교통 대신 자가차량 또는 기사의 동의를 구한 뒤 택시를 타면 어떨까. 버스나 지하철에는 좀비와 뱀파이어들만 타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있고, 심장이 약한 환자도 있고, ‘시월의 마지막 밤’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은 장년층들도 있다.

핼러윈이 본래 취지와는 달리 소비되고 있는데, 어떤 문화든 향유하는 쪽에 의해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 없다. 다만 한국의 핼러윈데이가 기성의 권위와 엄숙주의, 다양성과 소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화와 몰개성의 주류문화에 ‘한 방 먹이는’ 카운터 컬처라면 꼭 ‘호러쇼’나 하드고어 무비일 필요는 없다. ‘한국형 핼러윈데이’가 학습할 만한 좋은 모델이 있다. 매년 유쾌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사회 현실을 풍자하며 국민들에게 웃음을 주는 의정부고 졸업사진이다. 모두가 웃을 때에야 축제는 축제일 수 있다. 나의 축제가 누군가에게는 고통이라면, 그것은 축제가 아니라 지옥이다. 내년 핼러윈데이에는 부디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떠올리지 않게 되길 바란다.

이병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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