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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東語西話] 김시습보다 더 철저하게 은둔했던 오촌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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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의 부당한 행위 항거해 부산 금정구 仙洞 은거한 김선

단종 향한 일편단심으로 영월 쪽 朝夕 문안 인사 드려

생육신은 숨으려다 드러났지만 김선은 志操와 숨김의 뜻 이뤄

조선일보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은 능력이다. 묻혀 있거나 잊힌 것을 찾아내는 것은 실력이다.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는 능력과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해 대중화하는 실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긴 그것이 어찌 오늘만의 일이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점 일획도 빼거나 더하지 말라는 불문율이 통용되는 경전이 그랬다. 60만개 글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화엄경을 신라의 의상(義湘) 대사는 뛰어난 솜씨로 핵심만 추려 210자로 줄였다. 너무 줄였기 때문인지 다라니(呪文·주문) 대접을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영험을 기대하며 무조건 읽었다.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아는 이들은 붓으로 이런저런 사족을 달면서 다시 양을 늘려 갔다. 어떤 이는 소금을 넣었고 또 어떤 이는 맹물을 보태기도 했다. 그 시간이 1500년이다. 이런저런 많은 해설서가 나오게 된 연유이다.

생육신(生六臣)으로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 선생도 그랬다. 한때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승려 생활을 한 그는 1476년 서울 근교 수락산의 폭천(瀑泉·폭포) 주변의 작은 집에 머물면서 '의상 210자'에 주해를 달고 서문까지 썼다. 까칠한 성격 탓에 다른 이의 해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가들 외에는 접근조차 어려운 외국 글(한문)이 되었다. 그래서 부산 금정구 범어사(梵魚寺)에 있는 무비(無比·1943~) 스님이 한글 작업에 나서서 '법성게 선해(禪解)'라는 해설서를 냈다.

이 책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 한문 고전을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했다. 원저자를 모시고 상재(上梓)한다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인근 마을 선동(仙洞)에 있는 상현사(上賢祠)를 찾았다. 그곳에 있는 설잠 스님(매월당) 영정 앞에 책 간행을 고하고 한글본을 올렸다.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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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알고 보니 상현사의 실제 주인은 북계 김선(北溪 金璿) 선생이다. "육신현 북계회(六臣顯 北溪晦) 생육신 김시습은 드러났으나 북계 선생은 사라졌네"라는 김홍락(金鴻洛·1868~1933) 후학의 탄식처럼, 그는 가까운 친·인척을 제외하고는 별로 아는 이가 없는 묻힌 인물이다.

생몰 연대조차 불분명하다. 보여주기 위한 은둔이 아닌 진정한 은둔의 결과일 수 있겠다. 그래서 남들에게 소개할 때 매월당의 사촌형 아들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쉬워 보인다. 자리를 함께했던 모두에게 오늘 이후로 김시습의 오촌 조카로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선비 김선은 조선 세조의 정치적 부당함에 항거해 벼슬을 버리고 이 터를 찾아 은거했다. 단종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북쪽으로 창문을 내고 강원도 영월 방향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스스로 북계(北溪) 처사(處士·은둔한 선비)라고 불렀다. 한 줄기 맑은 시내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구슬이 흩어지고 옥을 내뿜는 것 같다는 이 계곡 주변을 산책하고 때로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북(北)과 계(溪)라는 글자는 연북(戀北·북쪽을 사모함), 퇴계(退溪·계곡으로 물러남)라는 단어가 말하듯 글자 자체가 은둔이라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신선처럼 산다는 동네 이름 선동(仙洞)도 마찬가지다. 생육신은 숨고자 했지만 오히려 드러났고, 북계 선생은 숨고자 하여 숨었으니 숨김으로써 완전히 그 뜻을 이룬 셈이다.

핏줄은 언제나 내 편이다. 없어진 정자도 사당도 복원하고 잊힌 어른도 기억하고 묻힌 인물도 기어코 찾아내는 힘이 있다. 북계 선생을 김시습과 다름없는 생육신으로 선양했다. 은둔 후 행적을 완전히 숨겼다는 점에선 오히려 사육신(死六臣)에 버금가는 인물일 것이다. 이 땅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작은 계곡이지만 많은 시문을 통해 의미를 부여했고 세 칸짜리 소박한 집을 복원하면서 기문(記文)으로 당신의 지조를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나오는 길에 잠시 은둔객이 되어 정원을 감상하며 차를 마셨다. 더불어 창문 너머 숨어 있는 북계의 아름다움을 '상현당기(上賢堂記·1925년 김홍락 지음)'를 통해 그 시절까지 음미해 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름다운 비단 무늬가 생기고(每風噓而錦紋生)

해질 무렵 저녁 노을이 금빛처럼 튀어오르는 곳(日沐而金光躍者)'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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