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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16] 이슬람의 피눈물인가… 가을이면 더 붉게 물드는 알람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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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 슬픈 그라나다의 800년 아라비안나이트

조선일보

그라나다와 알람브라는 동의(同意)다. 그라나다를 찾아가는 이유는 그곳에 알람브라가 있기 때문이다. 알람브라가 없는 그라나다? 무의(無意)하고 무미(無味)하다. 그러니 그라나다를 찾은 모든 이가 알람브라를 향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무턱대고 알람브라부터 찾아가서는 안 된다. 알바이신 언덕을 오르는 게 먼저다. 알바이신은 언덕 위에 형성된 그라나다의 옛 거주지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그렇다고 휴대폰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그저 위로,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 오르기만 하면 된다. 모두의 행선지는 성 니콜라스 광장이다.

너무 작아서 광장이라기보다는 공터다. 하긴 명칭이 무슨 상관이랴. 이곳에서 바라보는 알람브라가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특히 가을 저녁 무렵이 멋지다. 붉은 알람브라를 품은 색색의 단풍 숲, 그 뒤로 웅장하게 펼쳐진 시에라 네바다산맥의 흰 봉우리들. 남국(南國)에서 만나는 설봉(雪峯)은 낯설고, 설봉 위로 번지는 낙조(落照)는 애달프다. 석양이 질 무렵이면 발 디딜 틈 없는 광장에선 탄성과 탄식이 터져 나온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가슴에 품고 있는 자신만의 아라비안나이트에 도취된 듯하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건 알람브라와 그라나다가 간직하고 있는 그들만의 아라비안나이트다.

세상에 다시없는 文明

스페인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고, 사람이 보탰다. 그 중심에 안달루시아(Andalusia)가 있다. 오늘날 스페인의 남부다. 발음부터 낯설다. 아랍어 '알-안달루스(al-Andalus)'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베리아반도 내에서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는 지역을 뜻했다. 이슬람 세력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베리아반도에 머물렀다. 오늘날 안달루시아와 비슷한 규모로 세력이 줄어든 건 나스르 왕조(Nasrids·1232~1492) 때다. 나스르 왕조는 그라나다를 수도로 삼아 독특한 문명을 지켜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이후 일궈놓은 '공존의 문명'을. 이슬람은 정복자로 이 땅에 왔다. 말을 타고 반도를 정복했으나 말 위에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대인을 조력자로 끌어들였고, 기독교의 존재를 인정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당시 유럽의 눈높이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관용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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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조명에 싸인 알람브라는 그 자체로 아련하게 퍼지는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소절처럼 신비하고 아련하다. 그러나 누가 알까? 이곳에 얽힌 비루한 몰락과 강철 같았던 여인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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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A Lincoln·미국 16대 대통령)의 주장처럼 관용은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다. 코르도바를 수도로 한 이슬람 제국은 번창했다. 기독교 세력은 반도의 변방으로 내몰려 연명했다. 운명은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1031년). 코르도바 제국은 타이파(Taifa)라 불리는 지방의 대도시를 근거로 한 토후국들로 쪼개졌다. 타이파들은 기력을 되찾아가는 기독교 왕국들과 경쟁해야 했다. 권력의 무게 추는 점차 기독교 왕국들에 기울었다. 특히 카스티야 왕국이 무섭게 성장하며 이슬람 세계를 잠식해 들어왔다. 1248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Fernando Ⅲ·재위 1217~1252)가 세비야를 정복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알-안달루스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섰다.

알람브라의 슬픈 榮華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 왕국은 이 무렵 세워졌다. 건국자 무함마드 1세(MuhammadⅠ·1195~1273)는 지역 토호에서 출발해 왕국의 주인이 됐다. 그는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를 상위 군주로 인정함으로써 왕국의 안전을 도모했다. 군사력이 열세인 그라나다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카스티야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매년 카스티야에 엄청난 조공을 갖다 바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렇게 산 평화는 비록 굴욕적이었지만 그라나다 왕국에 번영을 가져다줬다. 알람브라는 그 번영이 낳은 결정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곳은 단순한 왕궁이 아니다. 요새와 별궁을 포괄한 거대한 권력과 문화의 중심이다. 훗날 알람브라를 지배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5세(Charles Ⅴ·1500~ 1558)가 남긴 르네상스식 왕궁도 근사하지만, 백미(白眉)는 나스르 왕조의 궁이다. 크고 작은 중정(中庭)이 건물을 잇고, 대리석 바닥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다양한 분수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모든 건물의 내부와 외관은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과 색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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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나스르 왕궁의 인공 연못과 그 위에 비친 건물의 완벽한 대칭이 당시 이슬람 사람들의 심미안을 반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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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궁정의 내밀한 곳에 있는 '사자의 정원(Patio de los Leones)'에 들어서면 말을 잊게 된다. 중정을 둘러싼 칼럼들은 궁극의 우아함과 섬세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깨끗한 중정의 대리석 바닥에 칼럼들이 비치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사실 묘사는 턱없고 덧없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는 그라나다의 눈먼 사람'이란 표현에 공감할 뿐.

그러나 이곳에서 나스르 왕조는 오랜 세월 군림하지는 못했다. 1492년 왕국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알람브라는 '붉다'는 아랍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알바이신에서 바라보면 노란빛이 감돈다.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알람브라에서만 볼 수 있는 칼라다. 황금같이 찬란했던 이슬람 왕조가 떠나며 흘린 피눈물 같다고나 할까? 그들은 왜 멸망했을까? 왜 알람브라를 떠나야 했을까? 한 여인 때문이다.

철의 여왕에 무너진 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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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Isabel Ⅰ·재위 1474~1504)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로 태어났다(1451년). 당시 왕국은 혼란과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녀의 아버지 후안 2세(Juan Ⅱ·재위 1406~1454)는 무능한데 장수했다. 50년 가까운 치세 동안 왕국은 혼란에 빠졌고, 백성은 도탄에 신음했다. 뒤를 이은 이복 오빠 엔리케 4세(Enrique Ⅳ·재위 1454~1474)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라나다 왕국으로 쪼그라든 이슬람 문명이 버틸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적(敵)이 무능했던 것이다.

이사벨은 1474년 즉위했다. 엔리케 4세와 싸워 쟁취한 왕위였다.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Fernando Ⅱ·재위 1479~ 1516)와 결혼한 그녀에게 반대하는 친(親)포르투갈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내전(內戰)은 4년간 지속됐다. 이사벨은 싸웠고, 다시 승리했다. 내전을 종식시킨 이사벨은 왕국에 안정과 질서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자신의 결혼으로 탄생한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의 힘을 결집시켜 지지부진했던 레콩키스타(Reconquista·재정복운동)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 최후의 보루인 그라나다 왕국은 험준한 자연과 강력한 요새 도시들의 보호하에 있었다.

당시 카스티야-아라곤의 군대 규모와 공성(攻城) 기술로는 정복하기 어려웠다. 내부의 반대와 재정 악화 등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레콩키스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단호한 의지에 행운의 여신이 화답한 것일까? 그라나다 왕국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술탄이었던 물라이 하산의 장남 보압딜(Boabdil·재위 1482~1483, 1487~1492)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자신을 왕위 계승에서 배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원인이었다. 보압딜의 찬탈과 그에 따른 내전은 그라나다 왕국의 힘을 소진시켰다.

보압딜은 아버지가 죽자 삼촌 엘-사갈(el-Zagal)과 싸웠다. 그동안 이사벨의 군대는 그라나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레콩키스타를 재개한 지 10년째 되던 1491년에 들어서자 그라나다 왕국의 영토는 수도를 제외한 대부분이 그녀 수중에 떨어졌다.

왕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이사벨은 그라나다 서쪽 경계에 포위 공격을 총괄할 사령부를 설치하고 '산타페(Santa Fe·성스러운 신앙)'라 명명했다. 이 전쟁이 단순한 영토 싸움이 아니라 성전(聖戰)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한 것이다. 성전에 어찌 후회나 후퇴가 있을까? 그녀의 강철 같은 의지 앞에 그라나다는 굴복했다. 1492년 1월 2일 보압딜은 그라나다의 열쇠를 이사벨에게 전달했다. 기독교인들의 수백년 숙원이었던 레콩키스타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나스르 왕조는 알람브라에서, 그라나다에서, 이베리아에서 쫓겨났다. 몰락은 분열로부터 시작된다는 역사의 진리는 이번에도 증명됐다. 알람브라를 떠나며 보압딜은 눈물을 흘렸다.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그저 가소로울 뿐. 오죽했으면 그를 가장 사랑했을 어미조차 '사내답지 못하다'고 핀잔을 줬을까? 그러나 우리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의 옛 이야기일 뿐이다. 보압딜이 있었기에 알람브라를 전쟁으로부터 보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비루한 리더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동의할 수 없다고? 지금 이 가을, 알바이신이나 사자의 중정에 서 있다면 동의하게 될 것이다

알람브라만 보고 가면 섭섭하죠… 왕실예배당도 '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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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에서 알람브라와 쌍벽을 이루는 곳은 왕실예배당(Capilla Real·사진)이다. 시내 한가운데 대성당 옆에 있다. 스페인을 탄생시킨 ‘세기의 커플’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두 사람의 딸이며 스페인 제국의 상속녀인 광녀(狂女) 후아나(Joanna·1479~1555)와 사위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펠리페 1세(FelipeⅠ·1478~1506) 최후의 안식처도 이곳이다. 이곳을 무덤으로 결정한 첫 번째 인물은 가장 먼저 죽은 이사벨 여왕이다(1504년). 8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슬람의 땅이었고 수복된 지 12년밖에 되지 않은 그라나다에 묻힌다? ‘죽어서라도 이 땅을 지키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면 그라나다를 빼앗기지 마라’는 후손에 대한 유언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그라나다는 아직까지 스페인 땅으로 남아 있다.

[그라나다=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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