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백영옥의 말과 글] [69] 내 안의 소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허수경 시인(詩人)의 부음을 듣고 서점에 갔다. 그녀의 마지막 책을 사 들고 집으로 오는 길, 침대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다가 그것이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의 개정판이란 걸 알았다. 가끔, 시인의 시(詩)보다 산문을 먼저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 허수경 시인이 그랬다. 그 책을 읽고 진주에선 비빔밥을 ‘꽃밥’이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됐고, ‘하마’가 실은 헤엄을 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마는 물 위를 헤엄치는 게 아니라 물길을 걸어 다닌다는 것이다.

물의 상처에 대한 얘기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녹차를 끓일 때 물은 서로 부대끼며 흘러가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물을 두서너 시간 전에 받아두고, 끓인 뒤 반드시 물을 식혀서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물의 상처까지 헤아리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 고국에서 떠나와 먼 독일에서 수십 년 고고학을 공부했으니 그녀가 바라봤던 세상은 우리와 달랐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외국어로 말을 하면 음성에 나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어로 말할 때 보이지 않던 나이가 아나운서가 한국의 전통 노래를 들려 달라고 부탁하자 드러나는 순간의 묘사가 그랬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갑자기 나이 쉰이 넘은 여자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는 순간 그녀가 느꼈을 아득함 말이다.

나는 너무 슬퍼하진 않겠다는 다짐으로 책을 읽어나갔지만 결국 뚱뚱했던 사춘기 소녀가 맘이 쓰릴 때마다 먹었던 단팥빵 이야기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소녀가 느꼈을 그 두렵고 외로운 단맛 말이다.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났다.

‘나는 그때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 천장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였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내 안의 소녀에게 그녀가 다독이듯 건네는 말이었다. 그녀가 오래 그리울 것이다.

[백영옥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