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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변종모의 세계의 골목] “지구의 나이테를 따라 걷는다” 베트남 산골마을 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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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들어낸 듯’…방대하고 정교한 계단식 논이 장관
삶의 깊이처럼 층층이 쌓인 논둑길, 마치 어머니의 뒷모습 같아

조선일보

사파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판시판을 마주한 산골 마을이다./사진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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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베트남의 북쪽 산중,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풍경으로 선을 긋는 곳 사파. 모든 풍경을 밟고서 내려다보면 간혹 나의 지난 시간이 보이기도 하는 곳. 가자, 가을이 먼저 깊어가고 있다.

◇ ‘베트남의 지붕’ 판시판을 마주한 산골마을 사파

하노이에서 밤 기차를 타고서 온 밤을 흔들리며 새벽을 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나와 비슷한 나이를 먹은 듯한 기차는 무성영화처럼 낡았었다. 격렬하게 괘도를 달릴 때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곤 했지만 10시간의 밤은 고요했다. 337Km를 북으로 달려 도착한 라오까이(Lao Cai)역 광장에는 사파로 올라가기 위한 미니버스들이 사람들을 살갑게 맞이했다.

해발 1650m의 산골 마을 사파.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버스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몽환의 아침 풍경. 고도를 높이며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더욱 커지는 심장 소리. 지친 밤을 가만히 두지 않는 아름답고 피곤한 아침의 인사. 엷은 구름 사이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흐몽족(H’mong People)의 화려한 옷차림이 때 아닌 꽃송이처럼 반갑다.

여행을 실감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풍경보다 현지를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행색에서 찾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야 나는 멀리 왔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 것이지만 그들이 나를 멀리서 당긴 것처럼 고마움을 실감하는 아침. 덕분에 모든 흑백의 풍경들이 천연으로 실감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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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650m에 위치한 산골마을 사파에 이르면, 방대하고 정교한 계단식 논이 그림처럼 펼쳐진다./사진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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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사파는 베트남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하게 다른 풍경이다. 거대한 파노라마, 베트남의 지붕이라 불리는 판시판(Pansipan, 3143m)을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판시판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이유로 신선한 날씨와 베트남 변방의 여러 소수부족들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인기 여행지가 되고 있다.

◇ 신이 만든 듯…방대하고 정교한 계단식 논

사파의 중심이자 만남의 장소, 중앙광장 근처에 서있는 사파교회는 1930년에 지어진 가톨릭 교회다. 식민지 시절 휴양 온 프랑스인들을 위해 지어 놓은 교회 앞에 화려하게 장식된 전통복장을 입은 부족들이 마스코트처럼 사람들을 반긴다. 교회를 기점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도 좋지만, 누구든 약속이나 한 듯 판시판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산 아래를 둘러보는 일로 여행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마을 깟깟(Cat Cat). 흐몽족의 생활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안내하는 사람 없이도 혼자서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도 저절로 만나게 되는 기본 코스라 할 수 있다. 사파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니 만큼 큰 기대 없이 가야 한다.

즐비하게 이어진 기념품 가게 사이로 펼쳐지는 계단식 논들은 멀리서 보던 풍경과는 다르다. 벼들이 익어가는 층층의 계단식 논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과 폭포가 옛날 엽서에 나오는 풍경처럼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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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논은 얼핏 보기 단순해 보이지만, 그 풍경은 볼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그래서 한 번에 이를 다 보기는 어렵다./사진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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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파의 볼거리는 계단식 논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단순한 풍경은 시간이나 날씨,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도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수백 개의 계단이 그늘을 만들고 높낮이를 달리하며, 위와 아래의 색깔이 다르며 지루하지 않은 곡선들로 평화롭게 누워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급한 마음에 사파에서 판시판산 꼭대기로 이어진 케이블카를 타고서 한 번에 다 보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직접 걷는 것만큼 좋은 여행이 없기 때문이다.

◇ 층층이 쌓인 논둑길 걷다 보면, 어머니의 포근함 느껴져

거대한 계단식 논을 가장 현실감 있게 체험할 수 있는 마을은 라오차이와 타반(Lao Chai & Ta Van) 마을이다. 사파에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계속 낮아지니 걷기도 더없이 좋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들과 층층이 쌓인 그 풍경들은 모두가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땀이다. 손마디가 굽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시간을 보내는 논둑길의 곡선들 전부가 그들의 것이다. 자세히 살펴야 겨우 발견되는 한 평생이 이곳에 수백 계단으로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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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이어진 길들과 층층이 쌓인 그 풍경들은 모두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땀으로 만들어졌다./사진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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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산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산을 따라 삶을 짓듯 논을 일구었을 텐데 논을 일구어 산을 만든 것처럼 정교하다. 보고도 믿지 못할 것들은 모두가 신들의 공으로 돌린다. 지구상에 또 하나의 풍경이 마음속 길을 내고 있다. 이곳은 베트남의 북쪽 산골마을 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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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의 논둑길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사진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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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르락내리락 쉴 새 없이 즐거운 자연의 골목

베트남의 북쪽 사파는 하노이에서 하루 여러 편의 버스와 여행사에서 운행하는 사설 버스를 손쉽게 탈 수 있다. 만약 기차를 탄다면 밤기차를 이용하는 편이 좋겠다. 사파의 관문 라오까이 역에 도착하면 미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사파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사파 시내는 생각보다 다양한 할 거리가 있다. 당일치기부터 여러 날을 걷는 트래킹을 통해 소수부족 방문이나 주변지역에 분포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사파 시내에서 판시판 정상까지 케이블카로 손쉽게 오르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상을 밟는 일도 사파에서 꼭 한 번쯤 해봐야 할 일이다. 사파에서 제일 큰 건물인 썬프라자 안에 안내소와 매표소가 있으며, 그곳에서 출발한다.

거의 모든 숙소는 가격 대비 훌륭하므로, 전망이 좋은 숙소를 고르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식당 역시 선택이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메뉴가 기다린다. 광장에서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여행자의 거리엔 밤마다 부족들의 공예품이나 특산품을 판매하는 시장이 열린다. 주말이 끼여 있다면 당일치기로 박하 일요시장 방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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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

[변종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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