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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책과 삶]퀴어문학을 밝힌 불꽃 ‘주나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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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우드

주나 반스 지음·이예원 옮김

문학동네 | 276쪽 | 1만3000원

경향신문

주나 반스는 우리에게 낯선 작가다. 하지만 듀나(Djuna)라면 어떤가. SF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듀나는 주나 반스에게서 필명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주나 반스라는 낯선 작가에게 도달하기 위해 듀나라는 징검다리를 거치는 것은 유용해 보인다. 마침 <나이트우드>의 한국어판 발문은 듀나가 썼다.

듀나는 주나 반스가 1920년대 미국 여성 작가들의 삶을 극적으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고 말한다. “삶과 예술의 자유,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환상을 좇아 영어권 세계를 떠나온 여성 예술가들, 주나는 이들을 대표할 만했다. 괴팍하고 난폭하고 재능이 넘치고…모두의 눈앞에서 죽을 때까지 상흔을 지울 수 없었던 격렬한 사랑을 했다.”

“매력적인 삶을 살며 매력적인 글을 썼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듀나는 주나 반스에게 끌린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주나 반스는 189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폴리가미(다자연애) 신봉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애인, 그리고 작가이자 여성참정권 운동가였던 할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공교육을 믿지 않았던 아버지 때문에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일러스트레이터, 기자로도 일했던 그는 1920년 파리로 이주해 제임스 조이스,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교류했고, 1921년 조각가 셀마 우드와 9년간 열정적이면서도 치명적 상흔을 남기는 사랑을 한다. “삶의 연속성은 담기지 않고 주요 대목들과 시(詩)로만 구성됐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절당했던 <나이트우드>를 편집해 1936년 출판한 것은 T S 엘리엇이었다. 엘리엇은 “너무나 좋은 소설이기 때문에 시로 훈련된 감수성만이 그것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고 평했다.

작품에 앞서 주나 반스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나이트우드>가 주나 반스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작품이자, 작품의 전복성과 혼종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이트우드>는 주나 반스의 애인이었던 셀마 우드와의 파국적 사랑을 반영한 서사로 읽혀왔고,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등이 전면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퀴어문학의 고전’이라고 불려왔다. 해설을 쓴 윤조원 고려대 영문과 교수는 “퀴어이론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등장한 퀴어 소설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며 “낭만적 사랑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주체를 파괴하고 교란하는 힘으로서의 욕망을 그리는 반스의 텍스트는 오늘의 시점에서 더욱 흥미로운 선구적 위상을 갖는다”고 말한다.

경향신문

주나 반스(1892~1982)는 1920~1930년대 파리에 거주하며 ‘퀴어 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소설 <나이트우드>를 집필했다. 자전적 이야기가 녹아든 소설 <나이트우드>는 이분법적 젠더규범과 낭만적 사랑의 이상을 전복하는 시적 서사를 선보인다.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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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젠더규범과 섹슈얼리티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퀴어’라면, 이 소설은 그 선두에 선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이트우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통념을 해체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이분법적 젠더 규범에 어긋나는 인물들이다. 소설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헤르비히 폴크바인이라는 여성의 출산 장면으로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헤르비히는 마치 군인 같은 기백과 풍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아들 펠릭스는 주류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귀족행세를 하며 로빈 보트와 결혼하지만, 로빈 역시 ‘소년의 몸을 지닌, 키가 큰 소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끊임없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오코너는 여장을 즐기는 무면허 부인과 의사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로빈 보트는 아들 기도를 낳고 펠릭스를 떠나 노라와 사랑에 빠지고, 또다시 노라를 떠나 제니와 함께한다.

<나이트우드>는 다가가기 쉬운 책은 아니다. 난해한 시적 문장들에서 일관된 스토리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 갈래에서 저 갈래로 종횡하는 문장들 사이에서 종종 길을 잃게 된다. 문장들 사이에 길을 잃는다해도 나쁠 것은 없다. 원래 밤이란 자명한 것들이 희미해지고, 억압된 것들이 고개를 드는 시간이 아닌가. “나는 내가 지칭하는 대로인가요?” “평범한 사람에게는 구석으로 쓸어둔 괴이함이 숨어 있는 법이고, 괴이한 사람에게는 한참 가라앉은 평범함이 숨어 있는 법이랍니다. 사람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을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죠”와 같이 소설 속 문장들은 현재에도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주나 반스는 ‘너무 일찍 도착한 작가’였는지도 모른다. 출간 당시 적게는 몇 단어에서 많게는 몇 페이지에 이르는 동성애적 요소를 대폭 들어내야만 했던 작품은 1995년에 삭제된 대목을 복원해 원작에 가깝게 재출간됐다. 이번에 출간된 <나이트우드>는 두 번째 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나이트우드>를 읽는 일은 즐겁다. 낯선 작가 주나 반스의 통념과 상식을 벗어난 삶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흥미롭고, <나이트우드>를 작가의 삶과 연결시켜 독해하는 것도 흥미롭다. 1936년에 출간된 소설이 어떻게 당대 사회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뒤흔들며 지금에도 유의미한지 해석하는 윤조원 교수의 해설을 읽는 것도 재미있다. <나이트우드>는 출간된 지 82년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도착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제 막 다양한 퀴어서사가 쓰이기 시작하는 지금이 <나이트우드>를 읽기 적합한 때일지도 모른다. “지금 주나 반스를 읽는 것은 1930년대나 20세기 말에 주나 반스를 읽는 것과 또 다르다. 더 이상 독서를 방해할 편견도, 갈증도, 의무감도 없다. <나이트우드>를 읽을 완벽한 때이다”라는 듀나의 말처럼.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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