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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이종길의 가을귀]獨사회학자가 '마트 덕후'가 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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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사람들이 경계심 내려놓고 편안한 슈퍼마켓 찾아 타인행동 관찰
특정한 환경 속 인간들 유형별 정리…다양한 세대·계층간 이해·포용 필요
"너는 이렇다" 미리 규정짓기 경계도…낙인 찍는 사회 개선하자고 역설

필자는 지난 개천절에 자가용을 몰고 여주에 다녀왔다. 아이들이 입을 겨울옷이 필요해서. 여주요금소에서 5㎞가량 떨어진 곳에 유명 아웃렛이 있다. 공휴일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주차에만 30분이 걸렸다. 아이들 옷을 둘러보기도 전에 녹초가 됐다. 사람들을 구경하러 온 것 같아 후회됐다.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명품 G매장 앞은 여전히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얼마나 할인하는지 궁금해서 대열에 합류한 적이 있다. 10분 정도 기다려 들어가니, 가방이나 옷에 태그가 없었다. 점원에게 가격을 물어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자의 기준으로는 30만원이 적당한데, 정확히 다섯 배였다. 백화점보다 저렴하다는 설명이 농담처럼 들렸다.

옆에 있던 30대 초반의 남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곁눈질로 가방을 흘끔거렸다. "이거 잘 어울리지 않아?"라는 물음을 심드렁하게 받아넘겼다. "별로야?" "아니." "나갈까?" "아니야. 더 구경해." 미묘한 기 싸움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몸이 가닐거렸다. 남자가 다리 찢어진 뱁새 같았다. 그는 황새를 따라갔을까? 서둘러 빠져나와 이후 일은 알지 못한다.

'카트 읽는 남자'의 저자 외른 회프너라면 끝까지 남아서 결말을 훔쳐봤을 것이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조형예술대학에서 이동성, 사회, 미래에 대한 테마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다. 주로 사람을 관찰한다. 계속된 주시와 고찰이 스스로를 파악하는 자양분이라 믿는다.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든 아니면 우리를 무시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 매달린다. 우리를 끊임없이 똑같은 인간관계의 함정과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희망과 좌절 사이의 경계 지점인지 모른다. 어쩌면 단순히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매력, 호기심일지 모른다. 혹은 남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일 것이다."

저자는 타인을 관찰하기 위해 슈퍼마켓을 자주 찾는다. 사람들이 대개는 비교적 꾸밈없이 행동하고, 경계심이라는 방패를 내리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저자의 말대로다. 슈퍼마켓은 물론 그보다 큰 대형마트를 갈 때도 운동복에 고무 슬리퍼 차림이다.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해 카트를 끌며 메모지에 적은 물건을 집어 든다. 계획하지 않은 물건을 살 때는 아내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래서 아웃렛에서 관찰한 커플처럼 야릇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저자에게 슈퍼마켓은 사회의 배양접시다. 제도화된 공간, 즉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공간. 진열대, 계산대 등을 둘러보며 반항적인 내면의 소리와 대화한다. 사람들을 보고, 분석하고, 평가하며 또한 분류하고, 편입시킨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어떤 신호를 이용해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에 꼬리표를 붙이는지 이야기한다.

이 신호들이 어떻게 작동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집을 어떻게 꾸미며, 어떤 친구들과 배우자를 구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은 어떤 모습인지 설명한다. 이어 여러 인물 군상을 유형별로 서랍에 넣어 분류한다. 아이와 함께 자동차를 끌고 온 여성을 통해 시민 중산층의 삶을,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무화과 잼을 찾는 남성을 통해 힙스터(유행 등 대중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의 태도를, 사사건건 비윤리적인 쇼핑 태도를 지적하는 부인을 통해 환경주의자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식이다.

타인을 서랍 안에 가두어 놓는 파렴치한 책이라고 규정하면 오산이다. 저자는 서두에서 여러 번 강조한다. "제발 내가 사람들과 사회 환경에 관해 적어놓은 내용을 100%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람." 이 책은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신호를 어떻게 지각하고 평가하는지, 그것이 세상을 보는 우리 시각을 어떻게 다루는지 등을 다룬다. 저자가 가리키는 것은 오로지 특정한 환경의 전형적인 구성원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전하는데 그칠 뿐이다. 어떤 환경이 한 인간을 결코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늘 포착할 수 없는 미미한 잔재, 즉 계산되거나 추정되지 않은 소량, 인간적인 요인이 남는다. 그래서 저자는 사람들을 설명하며 그들이 이상형 인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이런저런 사회 환경을 떠올리게 하는 누군가를 우연히 마주칠 때면 이 이상형 중 하나에 귀속시키고 비교할 것이다. 그가 특정한 사회 환경의 이상형과 비교적 가까운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은 이 이상형들과 비슷할 뿐이다. 인간은 너무나 복잡해서 완벽하게 위치가 정해지고 파악될 수 없다. 우리 중 전적으로 이런 환경 가운데 오직 하나의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많은 사람이 두 환경 사이를 넘나들거나 여러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여러 인물 군상의 분류를 하더라도 이들을 서랍 안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다양한 세대와 계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우리'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사회에서 개개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사람, 제도, 상황 등에 재빨리 그리고 거리낌 없이 낙인을 찍는 사회를 개선하자는 역설에 가깝다.

저자가 사는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직업 없는 남자를 사회에 기생하는 사람으로, 전쟁과 테러를 피해 빠져나온 사람을 경제 난민으로 여기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 흔하다.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그들을 자신만의 서랍 속에 집어넣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 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나올 수 있는 기회 역시 주어져야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아웃렛에서 관찰한 남자도 다르지 않다. 원래 시큰둥한 성격의 소유자거나 G매장의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다. 뱁새가 황새를 걱정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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