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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커피 얼룩에 첨단 기술의 난제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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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⑪ 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

최근 제품의 규모가 큰 디스플레이 소자는 제작 비용을 낮추기 위해 진공이 필요 없는 잉크젯 인쇄법으로 제작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잉크 방울이 마르면서 고르지 못한 얼룩이 생긴다는 점이다. 바로 커피 얼룩 현상이다. 잉크젯에서 커피 얼룩 효과를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가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유연인쇄전자 학회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 과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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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커피는 비밀로 가득한 경이로운 물질이다. 커피는 그 자체로 예술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학 원리가 숨어 있다. 커피 입자와 뜨거운 물이 마주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화학 반응과 물리 현상은 커피의 맛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커피 얼룩을 남긴다. 오늘은 첨단 잉크젯 인쇄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커피 얼룩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 커피 얼룩은 왜 반지 모양일까

뜨거웠던 지난 여름 한 강연에서 커피 얼룩을 주제로 예술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있다. 호기심 가득한 청중에게 간단한 과학 실험을 해볼 거라 예고를 하고 과학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간단한 실험 도구를 준비했다. 우선 청중 각자에게 스케치북 종이와 현미경에 사용되는 작은 유리판을 나눠줬다. 그 뒤에 방금 사온 따끈한 블랙 커피를 한 방울씩 스케치북과 유리판 위에 살포시 떨어뜨렸다. 커피가 마르는 동안,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커피 용액 안에 천 가지가 넘는 화학 물질이 뜨거운 물과 반응하여 복잡한 화학 반응과 물리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강연이 끝나갈 무렵 유리와 종이 위에 떨어뜨린 커피 방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봤다. 놀랍게도 작은 커피 방울은 대개 동그란 모양으로 말랐지만, 큰 방울은 저마다 독특한 얼룩을 새겨 놓았다.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실험에 참여한 청중의 표정은 마치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아이의 표정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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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이 실제 그 실험에서 진한 커피와 연한 커피를 각각 한 방울씩 유리판 위에 떨어뜨려 얻은 커피 얼룩이다. 진한 커피는 커피 함량이 약 1%고 연한 커피는 0.1%다. 물을 섞지 않은 에스프레소의 커피 농도가 약 5%다. 실제로 이번 시연에 사용한 진한 커피는 평소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다.

커피 방울이 다 마르면 그림과 같이 커피 얼룩이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남는다. 동그란 반지 모양을 닮아서 ‘커피 반지’라 부르기도 한다. 커피 얼룩이 반지 모양이 되려면 커피 방울이 놓인 표면이 평평하고 커피 방울 크기가 일정 크기보다 작아야 한다. 물방울은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려는 표면장력과 납작하게 만들려는 중력이 경쟁하는데 크기가 작을수록 표면장력 효과가 강하고 클수록 중력 효과가 크다. 그래서 약 2.7㎜보다 작은 물방울은 항상 동그란 모양을 가진다. 커피 얼룩 현상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으로, 커피가 아닌 먹이나 물감을 사용해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미술 작품은 물감으로 그린 커피 얼룩 현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997년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연구팀은 커피 얼룩 현상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했다. 당시 박사과정생이었던 로버트 디건(Robert Deegan, 현 미시건대학 교수)은 지도교수인 시드니 네이걸(Sydney Nagel)과 함께 획기적인 설명을 제안했다. 공중에 떠 있는 동그란 물방울은 마르면서 액체의 물분자가 공기 속으로 균일하게 빠져 나간다. 이때 액체는 기체로 확산하면서 증발한다. 전자기학을 연구했던 물리학자 맥스웰은 기체 확산에 의한 물방울의 증발 원리도 알아냈다. 커피 얼룩도 맥스웰 원리를 따른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커피 방울의 모양이다. 물방울은 공중에 떠 있으면 구형인데 평평한 표면 위에 놓이면 가운데가 볼록한 모자 형태가 된다. 흥미롭게도 볼록한 중앙보다 납작한 가장자리가 단위 부피당 표면적이 넓다. 그래서 물분자가 가장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워 가장자리의 증발 속도가 중앙보다 빠르다. 이렇게 되면 커피 방울 안에서는 중앙에서 가장자리를 향한 흐름이 발생한다. 이 흐름을 따라 커피 입자가 가장자리로 이동하여 쌓이고 결국 반지 모양처럼 가장자리에 진한 커피 얼룩이 남는다.

# 디스플레이에서 커피 얼룩 효과를 제거하라

커피 얼룩은 그저 재미있는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커피 얼룩 효과를 처음 보고한 1997년 과학저널 <네이처> 논문은 지금까지 구글 스콜라 기준 4527회나 인용되었다.[1]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연구 업적의 대표 논문이 4500여 회 인용된 것을 보면 커피 얼룩 논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논문이 규명한 현상엔 중요한 현대 과학의 난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자소자는 진공에서 원자를 쌓는 증착 기술로 제작한다. 제품의 규모가 큰 디스플레이 소자는 제작 비용을 낮추기 위해 진공이 필요 없는 잉크젯 인쇄법으로 제작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잉크 방울이 마르면서 고르지 못한 얼룩이 생긴다는 점이다. 바로 커피 얼룩 현상이다.[2] 잉크 얼룩이 생기면 소자는 제 기능을 못한다. 아무리 잉크 성능이 좋아도 소자로 만들 수 없다. 자연 현상을 거스를 수 없으니 당연히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잉크젯에서 커피 얼룩 효과를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가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유연인쇄전자 학회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 과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는 중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과학이 늘 만족할 만한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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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인 나는 우선 커피 입자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구입했다. 전자현미경과 레이저 산란법을 이용하여 커피 입자의 모양과 크기 분포를 각각 살펴봤다. 커피 입자 분석은 우리 연구실 김진영 학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림 2에서 보듯 커피 입자는 대부분 마이크로미터에서 나노미터 크기의 아주 미세한 입자다. 볶은 원두는 분쇄·추출·혼합·건조 공정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갖는다. 커피 입자는 뜨거운 물에 잘 녹는다. 완벽하게 녹지 않지만 대부분 물에 잘 녹거나 아주 미세한 나노입자는 물과 함께 여과지를 잘 통과한다. 커피 입자의 복잡성을 볼 때 커피 용액의 물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내가 진행한 한 연구에서 진한 커피 방울이 마를 때 순수한 물방울과 어떻게 다른지 분석했다.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순수한 물에 비해 커피가 들어간 용액의 증발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는 사실이다. 증발 과정에서 물에 남아 있는 커피의 양에 따라 증발 속도와 증착 균일도가 달라진다.[3] 이 결과는 미술 작품에서 물감의 농도에 따라 마르는 속도와 채색의 균일도가 달라지는 것과 유사하다. 회화 작품에서 커피 얼룩과 비슷한 물감의 흔적을 종종 찾을 수 있는데 농도가 짙은 그림일수록 채색이 균일한 결과를 볼 수 있다. 채색이 균일한 그림을 그리려면 농도가 짙은 것이 유리하다. 진한 커피 연구로부터 얻은 과학 지식으로 먹과 물감으로 그린 동서양의 미술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이디어 전개 과정을 다 기록하기는 어렵지만 예술에 대한 탐구가 과학의 돌파구를 발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최근 섬유에 떨어진 커피 방울이 만드는 얼룩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커피가 옷에 묻으면 되도록 빨리 없애야 한다. 따뜻한 물과 탄산수가 도움이 된다. 식초를 한 두 방울 넣어도 좋다. 푹 담가 두었다가 헹구면 좀 더 깨끗하게 얼룩을 없앨 수 있다. 비단에 새겨진 수묵화가 오랜 세월을 견디는 것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커피 얼룩은 꽤 단단히 섬유에 고정된다. 수묵화의 비밀이 새로운 첨단 의류 기술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예술과 과학은 서로 맞닿아 있다.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참고 자료]

[1] R. D. Deegan, et al. Nature 389, 827-829 (1997).

[2] B. M. Weon and J. H. Je, Phys. Rev. E 82, 015305 (2010).

[3] J. Y. Kim and B. M. Weon, Appl. Phys. Lett. (출판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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