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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아프면 나만 손해? 동료도 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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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며칠 전 사랑니를 뽑았다. 무섭다고 제때 뽑지 않고 시간을 너무 지체했더니 생각보다 큰 공사가 됐다. 턱이 퉁퉁 붓고, 밤부터는 몸살기까지 돌았다. 급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한밤중에 열이 오르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일 회사 못 가면 어떡하지?'였다.

몸이 아프면 출근 걱정부터 하는 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하겠지만 방송 직종은 조금 더 유별난 구석이 있다. 바로 '꼭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출연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생방송을 담당하는 뉴스 PD도 이런 직종 중 하나다. 모든 스태프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다가도 삐끗하면 사고가 나는 것이 생방송이다. 그런데 책임 PD가 아프다는 핑계로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면 톱니바퀴가 통째로 빠진 것이나 다름없고, 그날 방송은 속된 말로 '망한 것'이 된다.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자는 게 아니니 참을 만큼 참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람 힘으로 안 되는 상황에서도 견뎌야 할 때는 좀 난감하다. 가령 급성 장염으로 5분마다 화장실로 뛰어가야 할 '토사곽란(吐瀉亂)'에 시달리면서도 뉴스 PD는 생방송 시간에 부조정실에 앉아 있어야 한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죽을힘을 다해 1시간이 넘는 방송을 버티고 나면 알 수 없는 서러움에 눈물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내일도 방송 있으니 더 아프면 안 되는데…'라고 자신을 채찍질하게 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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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하게 유난 떨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쉬면 되지 않느냐는 타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PD의 가장 큰 책무 중 하나는 방송 사고와 시청률을 책임지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투입된 PD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니 긴급 투입된 PD는 결근한 동료 대신 일도 하고 방송 사고 위험까지 떠안게 되는 것이다. 아파서 하루 끼치는 민폐라기엔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 그러니 동료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서로 폐는 끼치지 말자는 암묵적 책임감이 있는 것이다.

어릴 때 엄마는 늘 "아프면 너만 손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아프면 나도 손해, 동료도 손해"라는 생각이 더욱 커진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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