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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사설]사법농단 관련 법관들에게 ‘구속은 없다’는 신호 준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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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수사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청구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서울중앙지법은 검찰이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변호사)에 대해 공무상비밀누설·절도·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로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유 전 수석연구관은 대법원 판결문 초고 등을 무단 반출하고, 압수수색영장이 기각되자 자료를 삭제·파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구속영장 기각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발부율이 훨씬 높은 압수수색영장조차 이미 몇 차례 기각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며 보인 행태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A4용지 2쪽, 200자 원고지 18장 분량으로 기각 사유를 밝혔다. 법원은 영장 기각 시 통상적으로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거나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설명을 붙인다. 이번과 같이 장문의 기각 사유를 내놓는 것은 이례적이다. 허 부장판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부분 피의사실은 죄가 되지 않고 변호사법 위반 혐의의 경우 위법 소지는 있으나 구속 사유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상 불구속 수사 원칙을 고려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첫째, 그동안 법원은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한 상태에서 피의자가 압수수색 대상 증거를 인멸한 경우 해당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대부분 발부해왔다. 이번에는 예외다. 둘째, 영장심사는 구속 필요성만 심리하면 된다. 하지만 허 부장판사는 기소되지도 않은 피의자에 대해 개별 피의사실별로 사실상의 유무죄를 판단했다. 셋째, 법원은 유 전 수석연구관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며 “해당 자료를 수사기관이 취득하는 것은 재판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밀유지가 필요한 사항이 아니다’라며 기각했다.

사실상 법원은 사법농단과 관련된 전·현직 법관들에게 ‘증거를 없애든 조사를 거부하든 구속은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폐지를 선언한다고 시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법원의 자정 의지를 기대하는 것은 이제 무망하다. 국회가 권능을 발휘해 법원의 후안무치한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특별법 제정을 통한 특별재판부 구성, 사법농단 사태 국정조사, 관련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 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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