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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friday] 허례허식 다이어트, 반갑다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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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남편도 걱정인 명절… 간소한 '宗家 차례상'을 아시나요

조선일보

'미니멀 추석'에 대한 해답은 뜻밖에 종가 제사상에 있다. 명재 윤증 종가의 기제사 상에 올라오는 제물(음식)들. 그릇 수를 줄이고 조화를 위해 3가지 나물은 한 곳에 담는다. 음식 낭비를 줄이기 위해 안 구운 조기를 반 토막만 올리고, 떡 대신 흰 무 생채를 올린다. 윤증 종가의 차례상은 이보다 더 간소하다. / 아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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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로 시집와 40여 년이 넘도록 차례를 포함해 묘사(墓祀)까지 1년에 십여 차례 제사를 모시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서 내 아들, 며느리들한테까지 제사를 물려주긴 싫어요." 종가의 종부 김상희(72·가명)씨가 말했다. 며느리에서 이제는 시어머니가 된 김씨는 제사의 무거운 짐을 자식 대에 물려줘야 하는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저야 집안 전통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그 세월을 인내하며 꼬박꼬박 제사들을 챙겨왔지만 삼시 세끼 차려 먹기도 바쁜 아들 며느리들에게 제사가 쉬운 일인가요?"

일산에 사는 10년 차 주부 이유신(38)씨는 작년 추석부터 차례 준비에 힘 쏟는 대신 명절마다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다. "명절 준비는 요리만 하는 며느리들보다 요리 재료 밑 손질을 하는 시어머니들이 더 힘들죠. 작년 추석 전 가족회의를 통해 제가 총대 메고 시어머니 좀 쉬게 해 드리자고 제안했어요. 시어머니가 대환영하시더군요." 이씨는 이후 차례상 차릴 비용으로 시부모님 효도 관광 보내드리고 자신도 친정에 들렀다가 바로 여행길에 오른다고 했다.

직장인 권오성(40)씨는 이번 추석에도 '전 부치기' 담당이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상 결혼 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었는데 명절마다 부모님과 아내 눈치 보며 고민을 하느니 직접 팔을 걷어붙이는 게 낫겠다 싶어 거들게 됐다"고 한다. "장손이 일하니 부모님이 마음 불편하셨는지 어느 순간부터 '음식량을 줄여서 하자'고 하시더군요. 요즘엔 한두 접시 나올 양만 해서 가족끼리 밥 한 끼 먹을 정도로 간소해졌습니다. 동네 떡집에서 송편 사서 올린 지는 오래됐고요."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남편도, 명절이 괴롭긴 마찬가지다. friday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추석을 앞둔 2060 기혼남녀 1234명을 설문한 결과, '추석에 가족 화목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이란 질문에 응답자의 44%가 '차례상 차림 등 가사 노동'이라고 답했다. '과한 지출'(24.3%), '뭐든 함께 해야 하는 대가족 문화'(21.2%), '장시간 대면·대화'(10.2%)가 그 뒤를 따랐다. 명절 갈등의 중심엔 역시나 차례가 있다. 이 차례를 줄이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려는 집들이 늘고 있다.

차례상 대물림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절반이 넘는 53.2%가 '후손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답했고, 39.1%는 '대물림 의사가 없다'고 했다. '오랜 전통이니 대물림하겠다'고 답한 사람은 7.7%였다.

허례허식 빼고 본래의 간소한 차례상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도 있다. 서울 효자동 '아름지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가가례'는 제사에 대한 선입견을 흔든다. 손이 많이 가지 않게 굽지 않은 생선 한 토막을 올리고 설거지 거리를 줄이기 위해 3가지 나물을 제기 하나에 한꺼번에 올리는 종가 차례상, 1인 가구를 위한 제기가 등장했다. 비우고, 줄이고, 버리는 바야흐로 미니멀 라이프 시대에 명절도 미니멀 하게 지내자는 흐름이 확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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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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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명절 폐지를 청원합니다'란 글이 올라왔다. '남성은 귀성길 장시간 운전, 여성은 차례 음식 준비로 모두가 힘든 명절'이라 운을 띄운 글은 '누구를 위한 명절이냐'며 호소했다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간략하게 명절을 보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마무리했다. 19일엔 종가 시어머니를 대신한 며느리의 글도 등장했다. '종가 며느리인 시어머니는 92세의 연세에도 명절만 되면 병이 난다'고 시작한 글은 '추석을 없애고 벌초 때 밥 한 끼 함께 먹는 걸로 대체하는 방법을 고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추석을 앞두고 '명절문화와 제사문화 시대를 반영한 변화가 필요하다' '명절 대신 공휴일을 늘려 달라' 등 명절 관련 청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가사 노동, 용돈, 명절 선물 순으로 부담

홍동백서(紅東白西·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어동육서(魚東肉西·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조율이시(棗栗梨枾·대추, 밤, 배, 감 순), 좌포우혜(左脯右醯·왼쪽엔 말린 고기, 오른쪽엔 식혜), 두동미서(頭東尾西·물고기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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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길 전쟁부터 명절의 시작. 이후 음식 준비, 설거지 더미 '미션'들이 차례로 기다린다. / 조선일보DB


매년 명절 차례상 앞에서 상차림 법을 외며 실기 시험 보듯 긴장한 얼굴로 준비한 음식을 올려놓는다. 늘 해오던 것처럼 5열 횡대로 각 잡아 제대로 갖추면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만 20~30여 가지. 경기 불황으로 치솟는 물가에도 차례상만큼은 변함없다. 여러모로 부담되는 건 사실이지만 조상님들께 올리는 차례 음식을 줄이기란 쉽지 않다.

friday 설문에서 '추석 때 가장 부담되는 것'이란 문항에 '차례, 가족 식사 등을 위한 음식 준비 및 가사 노동'이라고 답한 비율이 34.1%로 가장 높았다. '추석 때 가장 간소화하고 싶은 것'을 묻는 복수 응답 문항에도 57.5%가 '음식 준비 및 가사 노동'을, 30.5%가 '명절 선물'을, 27%가 '용돈 챙기는 문화'를, 24%가 '성묘 등 가족 행사'를, 21%가 '친척집 순방', 19.8%가 '차례 후 뒤풀이'를 선택했다. 40~60대 남성 중 20% 이상이 '음식 준비 및 가사 노동'이라고 답한 결과도 눈길을 끈다. 명절 음식 준비 및 가사 노동은 기혼 여성뿐 아니라 기혼 남성들에게도 직·간접적인 부담이 되고 있단 얘기다.

간편식, 휴대용 제기… 차례상 신풍속도

가족들 각자 숨 가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모이는 자체가 부담되기도 한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워킹맘 조수연(39)씨 가족은 2년째 '포틀럭(potluck·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 와서 나눠 먹는 식사)' 형식으로 차례상을 차려오고 있다. "그동안은 시어머니가 전업 주부인 큰 형님과 차례상을 차리셨는데 2년 전 시어머니의 '명절 파업 선언'으로 차례상 차리기는 며느리들 몫이 됐어요. 형님들과 상의 끝에 각자 음식 한두 가지씩 해서 차례상에 올리기로 했죠." 조씨는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차라리 깔끔한 것 같다"며 "차례상 문제로 생기는 갈등도 확 줄었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엔 '변종 차례상' 사진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과자만 접시에 담아 차린 차례상, 해외 여행지에서 현지 음식들로 차린 차례상도 등장했다. 지난 설 때 주부 조혜리(38)씨 집 차례상엔 와인에 망고, 포 등이 올랐다. 장손인 친정 오빠가 해외 근무를 가게 돼 가족들이 여행 겸 차례를 지내러 방콕에 가 현지 음식으로 차린 차례상이다. "그렇게라도 차리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요. 음식만이 꼭 조상에 대한 마음과 정성의 결과물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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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때 방콕에서 현지 음식으로 올린 조혜리씨 집 차례상. / 조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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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짓수와 양 줄여 간소하게

집집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차례상을 쉽게 바꿀 순 없는 법이다. 기혼남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추석 차례상'이란 무엇일까. friday의 설문 결과 37.2%가 '조상과 가족들이 선호하는 음식 위주로 가짓수와 양을 줄여 간소하게 차린 차례상'이라고 답했다. '가족 상황과 편의에 따라 차린 차례상'(34.6%), '전통 방식의 가짓수는 갖추되 양을 줄여 차린 차례상'(14.4%) 등 현재보다 조금 더 간소하게 차린 '미니멀 차례상'을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응답자는 전체 86% 정도를 차지했다. '푸짐하게 차린 차례상'은 13.8%에 불과했다.

'예를 갖추되 간소한 차례상'의 해답은 의의로 종가 차례상에 있다. 여염집보다도 간소하다. 파평 윤씨 명재 윤증 종가에선 차례상에 햇과일과 밤·대추·곶감을 올리고, 송편 대신 백설기 한쪽, 포, 맑은 물 등을 곁들인다. 제사상이 아닌 차례상이기에 밥, 탕, 나물, 전 등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올리지 않는다. 송편 대신 백설기를 올리는 이유는 '손 많이 가지 않고 겉과 속이 같은 떡을 올리라'는 조상의 뜻을 반영한 것이다.

제사 지낼 때 역시 손이 많이 가는 음식 대신 생물(生物)을 올린다. 생물도 온마리가 아니라 토막 내 반 마리만 올린다. '음식을 아꼈다가 후손들이 필요할 때 조리해서 먹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차례상의 크기와 음식도 매뉴얼화 돼 있다. '자손들이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그 정도만 유지하면 된다'는 의미란다.

명재 윤증 종가의 종손인 윤완식(63)씨는 "옛날에야 먹을 것이 귀해서 차례 올린 후 함께 식사하기 위해서라도 음식을 따로 했지만, 요즘엔 먹을 것도 풍족하니 기본은 지키되 제사나 차례에 제물(祭物)이나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종가문화를 알려온 의성 김씨 사우당 종부 류정숙(72)씨는 "제사는 효의 연장"이라며 "차례상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정신적 가치마저 흔들리는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본래대로 간소함을 유지하고 우리 세대 어른들이 후손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준다면 조금 더 오랫동안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인 김미영 박사는 "1~2인 가구가 늘어나고 소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제사상이 작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식생활 변화로 젊은 층이 제사 음식, 차례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면 간소하게 차려 뜻을 기리는 방식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커피·사이다 등과 같은 음료, 이색 음식을 올리더라도 모두 조상을 극진히 대접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대물림이 문제가 되진 않을 거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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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friday·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프로(Tillion Pro)' 기혼남녀 1234명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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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취향대로 명절 보내고파"

대기업 연구원인 이인철(42)씨는 "추석 연휴 사흘 동안 본가 1박, 처가 1박 하고 나면 끝나는데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72시간을 가족들과 보내야 한다"고 푸념했다. 본가에 가면 장손, 처가에 가면 맏사위인 그는 "이미 장손과 맏사위 역할만으로도 벅차다"고 했다. 2남 3녀 중 막내며느리인 이다혜(36)씨는 "시댁에서 명절 치르고 나면 친정도 필요 없고 얼른 집에 가서 혼자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했다.

'미니멀 추석'은 차례상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관계에도 적용된다.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추석 풍경'에 대한 문항에선 '가족 구성원의 취향 존중하며 각자 보내는 추석 풍경'이 33.5%, '직계가족 위주로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는 정도의 풍경'이란 답변이 33.5%가 나왔다. 14%만이 '전통적으로 대가족 모여 차례 지내고 음식 나누는 정겨운 풍경'이라 답했으며 '대가족 여행', '대가족 외식'이 각각 9%, 7.5%였다. 대면 시간이나 관계마저도 단순해지기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해석이다.

주영애 성신여대 소비자생활문화산업학과 교수는 "대인 관계에 대한 피로도가 높은 현대 사회에서 장시간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명절의 피로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며 "가족 간에 혈연이라는 동질적인 요소 하나로 '모든 걸 함께해야 해'라며 지나친 유대를 요구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라고 인정하는 게 우선시돼야 한다"고 했다.

올 추석부터 서로 부담 없는 간소한 차림으로 조상께 참배하고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는 미니멀 추석은 어떠실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길 바란다면 말이다.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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