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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미래의 눈]나를 끄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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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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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만에 오셨군요. 모니터링 데이터나 어제 받으신 건강검진 결과는 아주 좋아요. 물론 그걸로 모든 걸 알진 못합니다.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고 장기 활동과 호르몬 분비가 정상이라는 건 확인해주지만요.” 상담사가 성호와 태블릿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검사복을 제외한 옷과 장신구는 전부 벗어두고 오셨죠?” 성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담사가 책상 위의 제어판을 두드렸다. 작은 작동음이 들렸고, 검사실 문이 저절로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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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격증은 언제든지 온라인에서 확인하실 수 있고요. 이 검사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각이 없는 CCTV로 완벽하게 녹화됩니다.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서 녹화된 영상은 고객분께 지급된 암호키가 없으면 누구도 재생하거나 편집할 수 없습니다.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요. 그럼 팔과 다리에 힘을 빼시고 일어서서 검사복을 벗어주세요. 하나씩 해볼게요.”

이제 건강검진은 예전보다 훨씬 쉽고 편해졌다. 그보다는 몸의 일부처럼 작동하는 각종 전자장치들을 제거하는 과정이야말로 성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입을 자연스럽게 벌려주세요. 어디 보자, 우측 상악에 이너마이크가 있군요. 분리형이니 꺼낼게요. 좌측 어금니에 있는 구취 제거 약물 분사기도 분해할게요.” 신체 기구 상담사는 성호가 제출한 목록을 확인하며 익숙하게 지시했다. 귀를 드러내고 고개를 숙여라, 겨드랑이를 볼 수 있게 팔을 들어라, 양다리를 벌려라. 그럴 때마다 성호의 몸에 붙어 있던 전자장치가 하나씩 제거되었다. 성호의 목록에는 총 11개의 전자장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자, 이제 뇌파 채팅 중계기와 시각효과 부속품들을 몸에서 뗄 겁니다. 소통차단증후군은 없으시다고 하니 걱정 안 해도 되겠죠? 심하게 겁이 나거나 공황 상태가 올 것 같으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성호의 눈 위에 덮여 있는 전자렌즈에는 채팅창 여섯 개가 동시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들이 동시에 사라지고 뇌파 채팅용 인터페이스 아이콘들까지 전부 자취를 감췄을 때, 온몸에서 식은땀이 스며나오고 턱이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편이에요. 요즘 워낙 여러 제품을 몸에 달다보니 사용자 본인도 잊는 경우가 있거든요. 확인 좀 해볼게요. 아, 역시 하나 더 남았군요. 제거하고 나서 목록에 추가해드릴 테니 저장해두세요. 자, 끕니다.”

갑자기, 세상이 활기를 잃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성호가 비틀거렸다. 검사실 안에 생물이라고는 상담사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의자와 책상과 검사장비가 모조리 죽었다는 생각이 성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무나 적막한 세상 속에서 성호는 자신이 혼자라는 점을 더없이 강하게 자각했다.

상담사가 마지막으로 귀에서 뽑아낸 것은 24시간, 365일 힐링용 음악을 아주 작게 재생해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해준다는 마이크로 수신 모듈이었다. “다 됐습니다. 자, 이쪽으로 누우세요. 전자장치들이 적법한지, 서로 간섭은 없는지 검사하려면 두 시간 정도 걸려요. 주무셔도 돼요. 제가 깨워드릴 테니까요. 검사복 입으시고 마음 편히 계세요.” 성호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깨끗한 침대 시트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켜쥔 채 몸을 눕혔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성호는 채팅 동반자 52명과, 힐링 음악과, 뉴스 채널과, 24시간 연예 방송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관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담사가 전자장치를 전부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다시 살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첨단기술 상당수는 군용으로 개발되었거나, 군사기술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전쟁이 인류 최악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개발 의도가 불순하긴 하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서 비중을 점점 늘려가는 인터넷도 근원을 따라가면 군용 통신망과 맞닿아 있다.

포스트 휴먼, 즉 첨단기술을 이용해 한계를 극복하거나 능력을 확장한 미래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영화, 과학 기사, 신제품 개발 소식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해볼 수 있다. 특히 신제품 개발 소식에 간간이 등장하는 군용 연구제품들이 좋은 단서가 되기도 한다. 최근 양손을 모두 쓸 수밖에 없는 극한상황, 이를테면 화재 진압이나 군사작전 시에 사용 가능한 전화가 선을 보였다. 통화용 마이크 부분은 입속 어금니에 걸친다. 외관으로 보아서는 착용 여부를 알 수 없고 대화에 방해가 되지도 않는다. 무선으로 연결된 수신부는 달팽이관과 연결되어 진동을 소리로 바꿔준다. 이 기기는 더욱더 작아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기기는 결국 몸에 부착되거나 몸 안으로 이식되지 않을까 싶다.

신기술과 필요성은 끊임없이 되먹임을 주고받는다. 필요성이 대두되면 기술이 충족시키고, 새 기술이 능력을 보여주면 없던 수요가 생긴다. 개인방송이 점점 늘어나고, 사회관계망서비스가 정말로 ‘사회’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그 현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장비는 아직까진 우리 몸 ‘바깥’에 있지만, 요구가 많다면 마침내 우리 몸 안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휴먼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가 느끼는 유대감도 결국 기술과 존재 양식이 하나가 되어버리는 지점에 나란히 서지 않을까? 그러면 꿈같은 능력만 과장할 것이 아니라 새 부작용과 문제점까지도 새 기준으로 판단할 자세가 꼭 필요할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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