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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손현덕 칼럼]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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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어제부터 사흘간의 일정으로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에서 치러지는 경영학회 통합학술대회를 주관하는 이두희 고려대 교수. 현 한국경영학회 회장이다. 그가 임기 중 가장 관심을 쏟는 주제가 기업가정신이다. 그는 1년 전 차기 회장으로 내정되면서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 원동력은 불굴의 기업가정신이었다"며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를 얼마나 발전적으로 계승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해왔다.

그 일환으로 이번 대회 기간 중 기업가정신 세션을 구성하는 것과 함께 지난달에는 경남 진주에서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수도' 선포식을 가졌다. 이 회장이 기업가 수도로 진주를 지목한 건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작은 도시에 자리 잡은 지수초등학교라는 곳에서 정말 우연하게도 한국 대표 기업들의 창업자가 배출됐기 때문이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 LG그룹을 태동시킨 구인회·허만정 회장, 그리고 효성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이 시골 학교를 다녔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기업인의 산실이다. 이들이 태어난 곳 근처에 있는 '솥바위'에서 정기가 싹텄다는 전설(?)로 설명하는 건 엉뚱하며 조선 영조 시절 실학자인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진주를 생리(生理)가 좋은 곳으로 지목한 풍수지리 또한 군색하다.

이제야 경영학자들이 진주에 무슨 특별한 창업의 기운이 있는지, 부의 축적과 기업의 융성을 부른 남다른 유전자가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엔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속담이 있다. 서양에도 같은 속담이 있다. 다만 표현이 다르다. "3대를 지속하는 부자는 없다"는 것인데 우리 속담도 그 뜻을 되새겨보면 부자도 3대를 넘어 부의 세습을 장담할 수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한 가족이 3대까지 부를 유지하는 비율은 13% 정도밖에는 안된다.

진주에서 난 큰 부자 세 가족. 공교롭게도 이들 부자가 지금 3대까지 왔다. 삼성의 이병철가(家)는 3남인 이건희에게 기업을 승계했고, 이제 이재용 부회장에까지 이르렀다. LG는 구자경 이후 계열 분리를 단행하고 이후 본가의 장손인 구본무로 이어지는 승계를 거쳐 4세인 구광모에게 바통을 이어줬다. 효성은 창업주 조홍제에서 조석래로, 그리고 그의 장남인 조현준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진주 출신은 아니지만 현대차도 정주영-정몽구로 이어져 이제 정의선 부회장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려고 한다.

부와 경영권의 대물림을 두고 사회적 비난이 갈수록 거세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 그들에게 과(過)만 있고 공(功)은 없겠는가.

삼성의 2대 상속자인 이건희 회장은 누가 뭐래도 지금 한국 경제의 먹거리인 반도체를 만들어낸 기업가다. 그리고 TV, 냉장고 등 전자제품을 세계 1등으로 키워낸 것도 그의 독기였다. 그에게 극일은 신앙과도 같았다. 삼성에는 '넘사벽'이던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고(故) 구본무 LG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에서 2차전지의 가능성을 본 뒤 직접 샘플을 가져와 배터리 연구를 시작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1년에 2000억원을 까먹자 참모진이 사업을 접자고 건의했다. 그걸 뚝심으로 밀어붙인 구 회장이었다. 현재 주문을 받아놓은 물량만 60조원에 달하는 세계 최강 리튬이온 배터리는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조석래 회장도 재계 서열은 한참 뒤이지만 효성을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분야의 세계 1위 알짜기업으로 키우는 기업가였으며 현대 신화를 일군 정주영에 이어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무모할 정도의 역발상과 뚝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차는 아마도 변방의 기업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세계가 대한민국을 두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치켜세울 때, 그건 재벌 2세(LG는 3세)에서 멈춘다. 그 뒤를 두고 성공담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없다.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의 케이스 스터디도 창업주와 2세에 국한된다.

지금 이 그룹의 손자뻘에 와서 위기의 경고등이 켜졌다. 그들의 위기는 비단 재계만의 위기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위기로 이어진다. 시대를 탓하고, 환경을 핑계 삼을 일이 아니다. 기업가정신의 퇴색에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위기가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경주에 모인 경영학자들이 재벌 3세에게 고언(苦言)을 한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다시 한번 기업을 일구는 도전정신을 발휘하라고.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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