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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수)

중앙청 일대 수십만 인파… "주권 되찾은 감격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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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1948년 대한민국 출범] [9] 정부 수립을 선포하다

서재필·조소앙 등 축하 담화… 이승만, 자유 강조한 명연설

조선일보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한민국의 첫 국무회의가 열린 다음 날인 1948년 8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지 남한 주둔 미군사령관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게 8월 5일 자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음을 통고했다. 하지 사령관에게는 행정권을 이양받을 준비가 완료됐다며 8월 15일을 기해 이양 개시를 요청했다. 하지 사령관은 8월 10일 이를 받아들이고, 한국 정부와 협의할 대표를 지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에서 "정권 이양이 착착 진행되는 중이니 우리 3000만은 40여 년간 잃어버렸던 강토와 독립을 회복하는 이날에 누구나 감격함을 마지않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출신으로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은 8월 8일 언론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일이라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소학교 교장이라도 할 것이며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만이라도 유쾌하다"고 말했다.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은 "신생 정부는 외교·국방·재정 등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겠지만 그 외의 면에서는 자주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이 공식 선포되기 하루 전인 8월 14일 각계 인사들이 담화를 발표했다.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했던 원로 독립운동가 서재필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조선 민족이 참으로 자성하여 진정한 독립정부로 발전하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죽어서라도 만족하겠다"고 말했다. 김구와 함께 남북 협상을 추진했던 김규식은 "하루속히 남과 북이 완전한 한 나라가 되어 3000만이 다 함께 경축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할 뿐"이라고 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출범을 알리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경축 행사는 8월 15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해방 3주년이기도 한 이날 인파 수십만 명이 중앙청 정문부터 세종·태평 양 대로(大路)에 운집했다. 축하하기 위해 일본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과 그를 마중하기 위해 김포공항까지 나갔던 이승만 대통령이 군중의 터질 듯한 환호 속에 함께 식장에 도착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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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보다 늦은 11시 25분 개회가 선언되고 대한민국정부수립국민축하준비위원회 오세창 회장의 "자유를 잃었던 우리가 해방되어 주권을 찾고 이를 경축하는 것이니 오늘의 환희와 감격을 깊이 살리자"는 개회사를 명제세 부회장이 대독했다. 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사가 있었다. 그는 첫째,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면서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째,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을 주문했다. 셋째,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숭(尊崇)할 것을 주문했다. 넷째, 불량분자들이 민권 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다섯째, 양반 같은 특권 계급을 위한 사상을 버리고 개인을 존중하고 노동을 우대해 법률 앞에서 동등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국제 통상과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의 연설은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이며 인민민주주의나 공산주의의 대척점인 자유와 개인에 대한 강조였다.

이승만의 연설 후 맥아더·하지 사령관, 루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대표, 유어만 주한 중국총영사, 교황사절의 축사가 이어졌다. 맥아더는 "(한국이) 40년간에 걸친 압제 속에서 해방을 위해 싸워온 것에 감탄한다. 이제 정부가 서고 완전한 독립이 된 것을 무한한 마음으로 축하하며 그 위대한 민족성을 길이 빛내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 수립 축하식과 함께 미군정은 폐지됐지만 대한민국의 주권이 바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은 정권 이양에 관한 교섭을 시작했고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미군정의 정권 이양은 여러 개의 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제일 먼저 맺어진 것은 8월 24일 주한 미군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한 군사협정이었다. 다음은 9월 11일 맺어진 재정재산협정이다. 전반적인 정부 운영 규정을 명시한 이 협정이 체결된 뒤에야 부처별로 권한 이양이 완료됐다.

행정권 이양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경찰행정권 이양 완료 여부를 놓고 미군정의 조병옥 경무부장과 대한민국 정부의 윤치영 내무부 장관이 열흘 가까이 대립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9월 3일 정오를 기해 미군정 경무부의 지휘권이 대한민국 내무부에 이양됨으로써 마무리됐다.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 이양이 모두 끝난 9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관리들에게 첫 훈시를 내렸다. 이 대통령은 "잘되었든 못되었든 우리 손으로 된 정부는 일제의 정부나 미군정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부 명령에 절대복종하여 외부 선동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국권 회복에 전력을 다하여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경축 행사를 가진 뒤 한 달 만에 명실상부하게 출범하게 된 것이다.

공동기획: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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