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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84만가구 건보료 쇼크…"내가 왜?" 부글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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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만 가구 건보료 쇼크 ◆

아들의 피부양자로 등록돼 있어 지난 5년간 건강보험료를 전혀 내지 않았던 안 모씨(68)는 지난달 말 17만7800원이 적힌 건강보험료 고지서를 배송받고 고민에 빠졌다. 지난달부터 적용된 건강보험 부과 체계 개편에 따라 피부양자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안씨를 포함해 네 식구가 함께 모여 사는 115㎡(약 35평) 아파트가 재산과표 9억원(시가 약 18억원) 이하라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했지만, 이번에 기준이 과표 5억4000만원(시가 약 12억원)과 연소득 1000만원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월 120만원씩 나오는 국민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던 안씨는 "많지도 않은 용돈을 더 줄일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씨를 포함한 약 7만가구가 월평균 18만8000원의 보험료를 이번부터 새로 납부하게 됐다.

건강보험 부과 체계가 개편된 이후 피부양자 탈락자와 일부 고소득층 사이에서 인상된 건강보험료를 둘러싸고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소득은 거의 없는데 재산이 기준선을 넘는다는 이유로 신규로 건보료가 부과된 이들의 불만이 수백여 건 올라와 있다.

이번 건강보험 부과 체계 개편으로 지역가입자 중 고소득·고액자산가 39만가구는 월평균 약 5만6000원(17%)의 보험료가 인상됐다.

그러나 보장성 확대와 고령화로 인해 고갈되는 건보 재정 부족분을 일부 계층에 전가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의료쇼핑, 과잉진료 등으로 인해 건보료가 줄줄 새는 제도의 구조적 문제를 손질하지 않고서는 일부 계층에 '건보료 폭탄'을 돌리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불법 개설 요양기관인 사무장병원, 면허 대여(면대) 약국의 부당이익금이 2조원을 넘었지만 환수율은 7%대에 그치고 있다. 약 1조8000억원 이상의 건보료가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다. 지난 7월 국가가 일부 고소득자와 은퇴 노인 등 피부양 자격 탈락자에게서 추가로 거둬들인 보험료는 총 620억7000만원. 이를 1년치로 환산하면 7448억4000만원이다. 정부는 1조8000억원에 대한 환수 조치를 강구하지는 않은 채 누수액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을 고소득자·은퇴자들에게 전가한 셈이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누수되는 건보료를 차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항변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6월 외국인의 건보 가입 자격 요건을 국내 체류기간 6개월로 늘린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건보료 먹튀'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여전히 확실한 제약장치가 없어 가입자의 '양심'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 3년간 진료만 받고 출국해버린 외국인은 2만4000명. 금액으로는 169억원이다. 외국인 지역가입자 건보재정은 지난해 2000억원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세계 최고라는 건강보험제도가 곳간 풀린 외국인들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료계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외국인 먹튀로 줄줄 새는 건보재정을 막기 위해 재외국민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 건강보험공단 설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최고 수준의 의료보험'이라는 국내 시각과 달리 세계 보건전문가들은 한국 건강보험제도가 매우 불안정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고용주와 피고용주가 절반씩 부담하는 '직장건강보험'과 자영업자이거나 직장이 없어서 본인이 100% 부담하는 '지역건강보험' 모두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좋으면 기업과 지역경제가 활성화해 건보료가 잘 걷히겠지만 경제가 불황이면 보험재정이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경제 상황에 따라 지속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마크 브릿넬 KPMG 글로벌 헬스케어 대표는 '완벽한 보건의료제도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한국 의료기관은 정부 보조금이 거의 없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불하는 수가와 환자가 지불하는 실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며 "불확실한 경제 전망과 가파른 인구고령화를 감안하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줄줄 새는 건보재정과 함께 현행 건보제도의 손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건보제도는 불특정 소수(고소득층)에게서 많은 보험료를 걷어 불특정 다수에게 치료비를 지원한다. 수혜자 부담 원칙이 아니다. 또한 환자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1차(동네의원)나 3차(대학병원) 의료기관을 마음대로 찾아가 몇 번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올해 6월 발표한 의사의 환자 1인당 진료 횟수는 지난해 한국이 17회로 일본 12.8회, 프랑스 6.1회, 핀란드 4.3회보다 훨씬 많다. 모럴해저드에 따른 건강보험료 누수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보다 보장성이 높은 선진국에서 '의료쇼핑'이라는 말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건강보험 부과 및 지출 체계가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현행 제도는 평소에 건강을 관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을 가도록 조장한다. 연말정산 세액공제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이다. 병원에 자주 가서 치료를 받으면 본인 의료비를 많이 썼다고 환자나 환자 부양자에게 세제 혜택을 준다. 환자는 자신의 비용뿐 아니라 건보재정까지 썼지만, 정부는 '잘했다'고 위로금까지 얹어주는 꼴이다.

[이병문 의료전문기자 /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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