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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월드리포트] 한국 찾은 LA시장…한인동포 "환영하지 마라"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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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미국에서 한인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서부 로스앤젤레스(LA) 시의 시장인 '에릭 가세티' 입니다. 민주당 소속인 가세티 시장은 지난해 11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습니다. 1971년생으로 올해 나이 만 47세인 가세티 시장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차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대권 주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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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차기 대권 도전의 꿈을 꾸고 있는 가세티 시장이 한국 시간으로 오늘(26일)과 내일 한국을 방문합니다. LA와 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과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일본-서울-베트남-홍콩을 잇는 아시아 순방길에 나선 것으로, 일본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 방문국입니다.

가세티 시장은 한국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를 예방한 데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과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등을 면담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LA가 미국에서 뉴욕 다음으로 큰 제2의 국제도시인데다, 미주 한인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세티 시장이 차기 대선 출마 의사까지 밝힐 만큼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국무총리가 나서 가세티 시장을 만나 환영해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외교 의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반겨야 할 LA 한인 동포들은 "국무총리가 가세티 시장을 만나서는 안 된다" "환영해줘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LA 한인타운에 추진되고 있는 '노숙인 임시 거주지(shelter)' 문제 때문입니다. 지난 5월 2일 가세티 시장이 LA시의회 의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한인타운 안에 노숙인 임시거주지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게 주민들과 공청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데다가, 이후에도 노숙인 거주지 설치에 반대하는 한인들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계획대로 강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LA지역에서 노숙인 임시 거주지가 지정된 건 한인타운이 처음이었습니다.

5월 2일 가세티 시장의 발표 이후 지금까지 7차례에 걸쳐 노숙인 거주지 설치에 반대하는 한인들의 시위기 이어져 왔습니다. 연인원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한인타운 중심부에 노숙인 거주지가 들어설 경우 지역 상권과 주거환경이 크게 악화될 것이 불 보듯 하다는 게 한인사회의 반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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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노숙인 거주지 반대 운동을 이끌어나갈 윌셔 주민 연합(Wilshire Community Coalition-이하 WCC)이라는 한인 단체가 구성되기도 했습니다. '윌셔'는 한인타운 중심부를 관통하는 도로 이름입니다. 이렇게 구성된 WCC가 중심이 돼서 LA시청과 시의회도 여러 차례 방문해 반대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가세티 시장 측은 한인동포들의 대화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한인동포들의 '노숙인 거주지 설치 반대 입장'을 '님비(NIMBY)'로 매도했다는 게 한인동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입니다. 특히 한인동포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6월 5일 마지못해서 '노숙인 문제 관련 토론회'를 열긴 했는데, 이날 토론회장에 노숙인 거주지 설치에 강하게 반대해온 한인 3명의 참석을 거부하면서, 이른바 '한인 블랙리스트'라는 또 다른 사건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한인동포들이 한국을 향해 가세티 시장을 환영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한 것은 크게 4가지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한인타운 주민들의 의견수렴 없이 노숙인 거주지 설치 계획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점, 둘째는 비민주적 절차에 항의하고 반대 의사를 밝힌 한인동포들의 대화 요구를 묵살한 점, 셋째는 한인 사회의 입장을 '님비'로 매도한 점, 넷째는 시장실 주최 토론회 개최 당시 노숙인 거주지 반대의사를 펼쳐온 한인들의 참석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입니다.

제가 지난해 4월 LA 특파원으로 부임한 이후 몇 차례 노숙인들에 대한 보도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미국에서, 특히 서부지역에서 노숙인 문제는 큰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노숙인만 5만 명이 훨씬 넘을 정도입니다. 서부의 날씨가 따뜻한 데다 최근 수년 동안 서부에 몰려 있는 첨단 IT기업들의 영향 등으로 서부지역 경기가 호조를 보이면서 다른 지역에 살던 노숙인들까지 서부로 넘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LA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서든 노숙인들과 노숙인들이 세운 천막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인타운의 경우도 최근 규모가 커지면서 주택가 골목까지 노숙인들의 천막이 세워질 정도로 노숙인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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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문제가 골치 아픈 문제로 떠오르면서 차기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가세티 시장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노숙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아야 할 상황인 거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노숙인 문제가 대권을 향한 정치적 목표에 장애물이자, 자신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숙인 임시 거주지 설립 계획은 차기 대선 가도를 위한 가세티 시장의 승부수 가운데 하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LA 시내 주요 지역별로 노숙인 임시 거주지를 만들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노숙인들을 임시 거주지에 모여 살게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노숙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거지를 건설한다는 구상인 겁니다. 문제는 이런 구상이 '대권 도전'이라는 정치적 일정에 따라 급조된 방식으로 나왔고, 이를 성급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숙인 거주지 설치에 대한 한인사회 의견수렴 절차가 무시된 겁니다.

노숙인 거주지 문제와 관련해 한인동포들을 만나보면 '분노와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LA지역에서 첫 노숙인 임시 거주지로 한인타운을 지정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무시한 가세티 시장에 대한 분노가 첫 번째라면, 그만큼 '한인들의 정치적 힘이 아직도 이것밖에 안 되느냐'는 자조 섞인 좌절감이 두번째인 겁니다. 이런 한인들의 아픔을 더듬어 가다 보면 '1992년 LA 흑인 폭동'으로까지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당시 흑인 폭도들이 한인타운 상점들을 약탈할 때 LA시와 경찰이 한인타운을 무방비로 방치하다시피 하면서 피해가 커졌는데, 이번 노숙인 거주지 설치 과정에서도 정치적 힘이 약한 한인 사회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라도 이번만큼은 한인사회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은 노숙인 거주지 추진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는 게 전반적 한인사회 분위기입니다.

위에서 말한 WCC(윌셔주민연합)은 어제 LA 총영사관에 항의서한을 보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가세티 시장을 만나선 안 되고, 혹여 만날 수밖에 없다면 한인 사회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최소한의 우려를 표명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총영사관 측은 항의서한을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낙연 총리가 가세티 시장과 만남 자리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또 가세티 시장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언급을 할지 궁금합니다. 가세티 시장이 노숙인 임시 거주지 문제와 관련해 한인사회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안을 찾지 못할 경우 그의 대선가도가 시작부터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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